불사리의 역사는 부처님이 쿠시나가르에서 80세를 일기로 열반하며 시작한다. 이 사리 중 일부가 삼국시대에 한반도로 전래하며 거대한 목탑을 중심으로 사찰들이 건축된다. 이것이 고고학이 말하는 한국불교의 첫 페이지다.
이는 오늘날과 같은 보궁신앙과는 또 다르다. 모든 보궁은 자장 율사가 전래한 불사리를 통해서 확립되는 단일체계이기 때문이다. 즉 한국불교에서 적멸보궁은 자장이 모신 불사리와 관련된 특수성인 셈이다.
자장의 불사리 봉안과 ‘남북보궁’
자장 율사(594?~655?)는 진골 출신으로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출가한다. 이후 율사로서 명성을 떨치다 선덕여왕 때인 638년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642년 문수보살의 성산인 중국 산서성 오대산으로 성지순례를 감행한다. 이때 오대산 북대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불사리 100과와 부처님의 가사 등 성물을 받고는 643년 귀국한다. 이 사리를 나눠 모신 것이 한국불교의 적멸보궁이다.
자장은 646년 황룡사에 9층목탑을 건립하고 상륜부와 주심초석에 불사리를 봉안한다. 같은 해 말에는 언양(현재 양산)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에 불사리를 모신다. 이외에도 울산 태화사를 창건해 석탑에 사리를 봉안했다. 여기까지가 자장이 경주와 수도권에 불사리를 봉안한 양상이다. 그러나 황룡사는 1238년 몽고의 전란 과정에서 소실되고, 태화사는 여말선초에 폐사된다. 통도사만이 남게 된 것이다. 647년 선덕여왕이 비담과 염종의 난 과정에 죽게 되면서, 경주에서 자장의 입지가 흔들린다. 난을 평정한 김춘추·김유신 세력이 진덕여왕 시기를 주도하게 되자, 자장은 동북방의 하슬라에 은거하면서 평창 오대산을 개창하고 중대에 불사리를 봉안한다. 이후 평창 수다사와 강릉 한송사 그리고 태백의 정암사 등을 차례로 창건하는데, 불사리는 중대에만 모셨다.
이로 인해서 후일 양산 통도사와 오대산 중대의 ‘남북보궁(南北寶宮)’ 구조가 확립된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고산제일월정사(高山第一月精寺) 야산제일통도사(野山第一通度寺)’, 즉 ‘높은 산지에서는 중대 보궁이 속한 월정사가 최고며, 낮은 산지에서는 금강계단이 위치한 통도사가 제일’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했다. 또 월정사와 통도사는 보궁사찰이라는 최고의 위상에 걸맞게, 두 곳 모두 강원도와 경상도를 대표하는 교구본사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남북보궁의 특징
남보궁인 통도사는 자장이 창건한 계단사찰이다. 계단사찰이란 스님들의 수계를 위한 사찰이란 의미로, 새롭게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는 상징이다.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계단 맨 위에 석종형 부도를 조성하고 그 속에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봉안한 것이다.
「강희을유중수기(康熙乙酉重修記)」에 따르면, 성능(聖能) 스님의 원력으로 1705년 금강계단을 중수하는 과정에 두골(頭骨)의 존재가 드러난다. 이는 금강계단이 열린 가장 최근 기록이다.
통도사에는 자장이 문수보살에게 받은 부처님의 가사도 함께 모셔져 있는데, 이는 9월 9일의 개산대제에 맞춰 자장 율사의 가사와 함께 공개된다.
북보궁인 오대산 중대는 통도사 금강계단의 형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중대는 지하에 불사리를 매장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를 지궁식(地宮式)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지궁식으로는 당나라의 황실 사찰로 불사리를 모신 장안의 법문사(法門寺)가 있다.
중대 보궁이 지궁식을 취하는 것은 산의 형세와 관련된다. 중대는 비룡승천(飛龍昇天), 즉 용이 승천하는 형세의 터전 위 용의 정수리에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사분율』 권46 등 전승에 따르면, 인도의 용은 여의주를 머리 위 상투 속에 보관하고 있다. 중대 보궁의 지궁식은 이를 반영한 것이다.
조선 후기 편입되는 정암사·법흥사
정암사와 법흥사는 임진왜란 이후 보궁의 위상을 확립한다. 임란 과정에서 사명 대사는 통도사의 불사리가 위험하다고 판단해 사리를 이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암사를 거쳐 서산 대사가 주석하던 묘향산 보현사로 불사리가 옮겨진다.
정암사는 본래 자장의 입적 사찰로 뒤쪽 인근에 석실로 된 부도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임란 때 통도사의 사리가 임시 보관되면서 보궁의 위상을 확보하게 된다. 다음 법흥사는 본래 흥녕사(興寧寺)로 철감도윤 선사를 계승한 징효절중 국사에 의해, 886년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 사찰로 개창된다. 이후 고려 왕건의 후원을 받으면서 사자산문은 세력을 일신하게 된다. 참고로 흥녕사가 법흥사로 바뀌는 것은 1902년이니,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법흥사에는 연원이 정확하지 않은 석실과 부도가 존재한다. 이를 자장의 수도처라거나 자장이 불사리를 모셔온 석함이 있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으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임란과 호란 이후 사찰이 재정비되는 과정에서 정암사가 인근에 위치한 오대산 중대의 영향 등으로 보궁을 표방하게 되자, 법흥사 역시 선문의 대찰로서 보궁을 천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정암사사적』에는 정암사 다음으로 사자산(법흥사)이 보궁으로 언급된다. 정암사의 보궁 천명 시점에서 멀지 않은 때 법흥사 역시 보궁으로 편입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암사사적』은 설악산 봉정암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는 『정암사사적』이 찬술되는 조선 후기까지 봉정암은 보궁이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즉 오늘날의 5대 보궁은 남북보궁의 2대 보궁이 1차며, 이것이 확산된 것이 정암사와 법흥사를 포함하는 4대 보궁이다. 마지막으로 봉정암이 편입되면서 5대 보궁이 완성된다.
가장 미스테리한 보궁, 봉정암
봉정암은 일제강점기 때에도 보궁이라는 명칭이 붙지 않았다. 최근에 보궁으로 편입된 것이다. 실제로 불사리가 모셔진 보궁이 있다면, 그 사찰은 결코 작은 암자로 유지될 수 없다. 신라는 차치하더라도 불교 왕조인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불사리가 봉안된 사찰을 암자로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의당 통도사나 월정사와 같은 대찰이 되는 것이 맞다.
봉정암은 매우 이질적인 보궁이다. 자장과 관련된 이렇다 할 연결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봉정암 5층석탑에 모셔진 사리가 뇌사리라고 하는 것은, 오대산 중대에 뇌사리가 봉안돼 있다는 전승을 차용한 것이다. 또 봉정암에 3번 오면 반드시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동국여지승람』 권47에 수록된 최해(崔瀣)의 금강산에 대한 내용 중 “한 번 이 산을 보면, 죽어서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구절과 「금강산유점사사적기」 속 양촌권근의 “금강산에 3번 오르면 3악도를 면하게 된다”는 내용을 환기한다. 봉정암의 보궁 주장은 인근의 오대산 중대와 금강산의 영향을 받아 최근에 완성됐다고 추측할 수 있다.
통도사 불사리가 만든 보궁들
임진왜란 때 사명 대사의 주도로 통도사의 사리가 이운되는 과정에서, 정암사만 보궁으로 대두한 것은 아니다. 이때 가장 대규모로 사리가 나눠지는 곳은 금강산 건봉사로, 총 12과의 치사리가 봉안되기 때문이다. 건봉사는 강원도를 대표하는 최대 사찰 중 한 곳으로 일제강점기 본사로 지정되는 대찰이기도 하다.
또 사명 대사가 주석한 묘향산 보현사에도 통도사의 사리가 남게 된다. 이 사리는 용주봉의 진신사리탑에 모셔진다. 이로 인해 보현사는 민비가 시납한 대장경과 서산 대사 등의 고승을 합해 불법승 삼보사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외에 고려 말인 1362년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몽진하는 과정에서 통도사의 사리 1과를 이운해 모신 법주사 보궁이 있다. 법주사에서는 이로 인해 부도탑 앞에 사리각을 조성해 예배 공간을 마련하게 된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남북보궁이 확대된 5대 보궁 외에도 보궁이 더 존재하며, 강원도에는 건봉사까지 무려 4곳의 보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이들 사리의 출처는 자장 율사가 모신 통도사 사리인 점을 알 수 있다.
사진. 유동영
자현 스님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월정사 교무국장을 맡고 있다. 인도·중국·한국·일본과 관련된 160여 편의 논문을 한국연구재단 등재지에 수록했으며, 5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