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보다 끝 바로 전이 더 끝 같다. 조금 더 가면 끝일 때, 끝이라고 느끼는 것은 거기다. 끝에 다다르면 끝은 없다. 가는 사람은 가지 않고, 비는 내리지 않는 것처럼, 끝에서는 끝을 볼 수 없다. 이미 끝이기 때문에, 끝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를 간다 하더라도, 거기가 끝일 수는 없다. 끝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과정일 뿐. 그러므로 끝은 끝을 향해 가는 그 애절한 시간 속에 있다. 11월이 그렇다. 한 해의 끝은 12월이지만, 11월이 더 끝 같다. 11월이 그런 것은, 겨울로 가는 길이며, 물끄러미 끝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의 끝인 밤도 그렇다. 사위가 어두워 칠흑 같은 밤중이 되어서는 밤이 없다. 해는 져서 사방이 어둑어둑하고 땅
거미가 짙어지는 그때에, 저 서편에서 밤이 오는 것이 보인다. 어슬어슬 저물어 가는 하루의 끝을 바라보며 두루두루 둘러앉아 막걸리 한잔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시간. 사랑보다 더 사랑 같은 것은 아직 사랑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랑 바로 앞에 있을 때다. 가슴 두근거리고,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때, 밤새 잠 못 이루는 애달픈 시간들이 사실은 사랑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이 나중에는 사랑보다 더 사랑 같은, 사랑이 익어가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지나고 보니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끝과 밤과 사랑 같은 것들은 어느 목적지에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불편하고도 애절한 여정에 있지 않은가 한다.
“야생성이 사라지면 멋이 없어, 거칠고 막된놈도 일견 중다운 면이 있거든”
지리산 암자, 12번째 길이다. 한 해가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왔다. 늦가을 지리산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그러나 눈이 오면 설산 지리산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그러다 봄이 되어 온통 철쭉이 피어나면? 하니, 지리산은 안 아름다울 때가 없고, 내가 서 있는 지금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지리산 남쪽 깊은 곳의 아란야, 관음암. 진명 스님 찾아가는 길이다. 산으로 들어오면서 나는 그 붉은 가을빛과 낙엽 구르는 소리, 모과의 향기, 산에서 딴 감의 단맛, 밟고 선 땅의 감촉들, 그런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에 더해 저 아란야에서 나머지 하나, ‘법(法)’을 찾아 ‘육경(六境)’을 맛보게 될까? 지리산 갈 때마다 나는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이 작은 토굴에는 다섯 번째 가는 길이다.
“스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볕이 드는 마루가 좋아요. 여기들 앉으세요.”
마루에 걸터앉아 물었다. 나는 늘 혼자 어찌 사시냐고 묻는다. 우번대 법종 스님은 40년을 살았고, 상무주암 현기 스님은 30년을 넘게 혼자 살았는데, 한 사나흘 지난 것 같더라고 했다. “술은 음지에서 익히는 거잖아요? 도(道)도 음지에서 익는 거고, 지금 그러는 중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요? 하하. 뭔가가 털어져 나가는 것 같습디다. 속세의 홍진, 내 마음속의 티끌들, 마음이 더 맑아지고 좋습니다.”
마당 앞에 늙은 고로쇠나무, 키가 하늘로 뻗 었다. 그 가지에 새가 날아와 앉고는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산짐승들이 가끔 오고 갈 것이다. 스님이 자기 먹을 것을 좀 나눠줄 것이고. “산속에서 게으르면 못살아요. 혼자 살면 대충 살 것 같죠? 게으르면 한없이 게으르게 되고 나중에 밥도 안 해 먹게 됩니다. 자신에게 더 엄격하게 살아야 돼요. 그래서 토굴이 대중방보다 어렵다고 하는 거 같아요. 그동안 새벽예불도 빼
먹고 그랬는데, 지금은 정확히 새벽 3시에 일어나 도량석 하고, 예불 올리고, 공양하고, 사시예불도 올리고, 큰 절에서 하는 그대로 혼자 합니다.”
진명 스님, 산에서 홀로 사니 야성(野性)이 되살아난다고 했다. 시금치도 하우스 것, 노지 것이 다르듯이, 선방이나 도회지 절에 살면서 순치되던 본성이 회복되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저녁예불 끝나고 마을 내려가 술먹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도량에 널브러진 개차반들 많았어요. 화엄사에도 있었지, 쫓아내려면 해보라고 주먹을 휘두르고. 여름에는 마당에서 자다가 새벽예불 들어온 사람도 있었고. 세상
이 거칠면 그래요. 근데 지금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요. 다들 시류에 둥글어지고 정갈해진 거죠. 그 대신 야생성이 사라지면 멋이 없어요. 인물도 안 나옵니다. 그 거칠고 막된놈도 일견 중다운 면이 있거든요. 근데 지금은 물도 아니고 술도 아니고, 더 좋은 것 같아도 하나도 좋을 거 없어요. 그런 거칠고 부자유스러움이 사실은 그 뒷면에다 그만한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는 거예요. 단점이, 단점이 아니에요. 내가 도를 통했노라, 하고 옳든 그르든 간에 선지식한테 들이받고, 고개 딱 쳐들고, 일체불이(一體不二)가 이와 같은데 당신도 그렇습니까? 그러면 법회 분위기가 팽팽해지죠. 선지식도 엄청 긴장하는 거야. 억만 볼트의 불을 켜야돼.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한 방에 가는 거거든. 그렇게 대들던 놈이 새벽에 술 먹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놈이라니까, 누가 그놈 욕을 해? 지금은 술도 안 먹지만 그런 에너지도 없어요. 뭐가 더 나은 세상이에요?”
잘 나가다가 갑자기 질문이 날아온다. “술 먹는 세상이요” 하고 얼른 추임새를 넣었다. “깨갱, 지금은 위에서 헛소리를 해도 깨갱 합니다. 그냥 상하가 있을 뿐이에요. 서로 편한 거고, 편한 게 좋은 거고. 치열하게 살던 시절은 갔어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름이에요? 그것을 어디에 한정해서 말할 수 없어요.”
“상입상즉, 각자 다른 악기로 다른 소리를 내면서 조화롭게 하나의 선율을 이뤄 장중히 흘러가는 것”
쌀쌀한데 들어가서 차나 한잔하자고 해서 안으로 들어왔다. 방이 넷이나 앉으면 꽉 차겠다. 관음보살 모시고 함께 사는 인법당 하고 손바닥만한 공부방이 전부다. 책이 가득한 공부방, 늦가을 아침 햇살이 좋다. 방은 작아도 창이 크다. 창으로 보이는 겹겹의 산봉우리들, 그것이 이 집 안마당이다. 스님 안에 깃들어 있는 저 당당함, 칼칼함, 혼자 살면서 새벽예불을 거르지 않는 자신에 대한 엄격함, 수좌의 자유로움 같은 것들이 『능엄경 정맥소(正脈疏)』를 번역하는 근력이 되었을 것이다. 늘 책은 학인들의 것이었는데, 수좌가 장장 40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을 한역(韓譯)해 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정맥소’는 명나
라 말 진감 스님이 쓴 『능엄경』 해설서다. ‘소(疏)’는 주석(註釋)이라는 뜻이다. 다른 주석가들이 교학의 틀로 능엄경을 해석한 것과 달리, 오직 경의 맥락에 의지하여 풀었다고 해서 ‘정맥(正脈)’이라고 부른다. 한글 번역은 그동안 부분만 있었을 뿐 완역은 없었는데, 진명 스님이 2009년부터 10년에 걸쳐 전 4권(불광출판사)을 완성한 것이다.
“『능엄경』이 뭔가요?”
“화엄으로 가는 다리입니다.”
“정맥소는 뭔가요?”
“글로 써놓은 선(禪) 같은 것이에요.”
“원래 한학 공부를 좀 하셨습니까?”
“나는 학문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출가 후 줄곧 걸망 메고 선방으로 떠돌고 산천골골 선배들의 아란야에 깃들기를 좋아했지요. 그러다 운명처럼 정맥소를 만난 거고, 10년 넘게 장구한 문장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겁니다. 나는 한문을 번역한 게 아니라, 경의 맥락, 본뜻에 최대한 가까이 가보려고 노력했어요. 선과 교는 다르지 않습니다. 정맥소를 읽으면서 새로운 한 세상을 보았어요. 산 정상에 올랐을 때 하나의 걸림도 없이 탁 트이면서 일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머리는 찬 얼음물로 씻은 듯 시원했다고 한다. 가슴은 장원심이 일어나 세세생생을 시원찮은 하근기 수행자로 살아도 견딜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한 듯했다고 하고. 이러한 꿀맛을 어찌 나만 즐길 것인가, 해서 “이런 무모한 짓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능엄경』으로 건넌 화엄은 어떤 세상인가요?”
“화엄은 연기입니다. 다들 아시는 대로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하나가 전체고 전체가 하나다. 이 무진연기(無盡緣起)를 상입상즉(相入相卽)으로 많이들 설명합니다. 영구불변의 본체적 존재로서 체(體), 기를 변화하고 작용하는존재로서 용(用), 이렇게 ‘체용론’으로도 설명하고요. 상입상즉은 오케스트라 같은 거예요. 각자 다른 악기로 다른 소리를 내면서 시끄럽지 않은 것, 1백여 명이 내는 소리들이 매우 조화롭고 아름답게 하나의 선율을 이루면서 장중히 흘러가는 것, 서로 상즉상입 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어요.”
모든 존재는 서로 기대고 있다는 것, 서로 기대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산길을 오르면서 생각했던 색성향미촉, 거기에 더해 오늘 배운 ‘법’이 아닐까? 아니 불교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 무릎을 치는 것, 결국 내게 기대어 오는 자에게 나는 자비를 베풀 수 있느냐의 문제 아닌가, 하고 되묻는 것이 ‘법’일까? 생각이 오락가락한다. 친구 같은 스님께 인사하고 내려오는 길, 머잖아 산이 진명 스님께 한 소식을 들려줄 것이다. 끝보다 더 끝 같은 11월, 아름다운 늦가을이 가고 있다. 며칠 지나면 우리는 끝에 도착할것이고, 그러면 끝에서 또 한세상을 꿈꿀 수 있도록, 하얀 첫눈이 오지 않겠나!
이광이
60년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 따라 대흥사를 자주 다녔다. 서강대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했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와 더욱 친해졌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냈고, 도법 스님, 윤구병 선생과 ‘법성게’를 공부하면서 정리한 책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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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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