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이 넘는 한국불교의 역사 속에 만들어진 많은 불상 중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성과 모습을 가장 잘 닮은 불상을 꼽으라면 서산마애삼존불을 들겠다. 서산마애삼존불은 그만큼 인간적이기도 하고 밝고 해맑은 모습이 우리들의 부모형제와 이웃을 닮아 있으면서 종교적 성상聖像으로도 흐트러짐이 없다. 그것도 불교가 이 땅에 들어와 오랜 시간이 지난 때가 아닌 삼국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데 경이로움을 금할 수가 없다. 그리운 이와 오랜 시간 헤어져 살아가야 할 우리들의 삶에서 그 사람을 부르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갖는 정한情恨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리운 이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그것은 가까운 시간 안에 실현되는 일이 아니다. 그만큼 삶 은 고되고 어렵기도 하다.
많은 사람에겐 그리운 이와 오랜만의 해후를 꿈꾸는 것도 설레는 일이지만, 멀리서 생각하고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한켠이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형상을 그리고 만들어 그를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산마애불을 보면 그리운 이가 산기슭 바위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불상으로 형상화한 듯하다. 서산마애불은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가야산 계곡 위 한쪽 절벽에서 천 년을 넘는 시간동안 티 없는 밝은 웃음을 지으며 그리운 가족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산중턱 절벽의 마애삼존불은 여래상을 중심으로 좌우보살상은 자세와 크기가 다르지만 모두가 환하게 웃고 있다. 마치 가슴에 영원히 각인된 그리운 이의 사진처럼 말이다.
불상은 종교적 성상이다. 매일 예경하는 상으로 모셔진 존상이기에 여기에는 우리가 어떤 공간 을 배경으로 찍은 인물사진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종교적 도상으로 일정한 규범을 가지고 있다. 자세에서 손짓 하나까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불교에서는 붓다의 모습을 32상 80종호 로 규정하면서 이를 부처가 갖는 특상特相이라 말 한다. 이 규범에 따라 상을 만들다 보면 인간의 모 습과 다른 특별함을 강조하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상들은 인간다움이 없는 관념된 종교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부처는 불교에서 수행으로 도달하는 궁극적으로 완성된 모습이다. 부처는 수많은 세월 동안 선행공덕과 수행 속에 인간이 갖는 탐· 진·치의 속기를 제거하거나 넘어서 인간 본원의 청정한 모습으로 존재의 궁극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종교적 형상으로 표현된 것은 어쩐지 인간다움과 거리가 있는 존엄한 황금빛의 모습이다.
이곳 서산마애불의 주존과 양협시보살상은 지극 히 인간적인 따뜻함과 함께 종교적인 평정함과 청정함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불신 전체에서도 느껴지지만 특히 삼존의 상호에서 확연히 느껴 진다.
주존과 양 협시보살이 가지는 웃음은 차별이 있지만 그것은 인위적으로 웃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천진한 본래의 웃음으로 참으로 인간다움을 가진다. 주존의 따뜻하고 넉넉한 상호에 서 보이는 다정한 눈길과 미소는 자애로움이 가득 해 만중생의 모든 걱정과 슬픔을 다 받아주실 듯 하다. 또한 우협시 봉주보살상의 볼륨 넘치는 얼굴에 수줍은 듯한 상호, 반개한 눈과 살짝 짓는 천진스런 미소는 양손으로 감싸고 있는 보주와 함께 신비롭기 그지없다. 또 다른 왼쪽 반가사유상의 얼굴은 통통한 볼에 장난기 넘치는 앳된 소년의 얼굴로 미소 또한 천진스럽다. 이러한 자연스럽고 인간미 넘치는 불상은 백제 특유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연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참으로 인간적이고 따뜻함을 간직한 자애로운 모습이지만 이상적인 비례나 균형을 갖 춘 상은 아니다.
필자는 미술가로서 서산마애불을 그려보고, 점토로 모델링을 해보고자 애를 써봤지만 그 모습을 온전하게 표현하기 어려웠다. 물론 화강암 절 벽에 조각된 상을 작은 스케치북에 그리거나 점토로 축소하여 표현하는 데는 조형상으로 한계가 있었지만, 그것은 재료나 표현기법에서 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명작을 닮게 만든다는 것은 원작의 계측을 통하여 비례나 동세를 따져 볼륨과 매스를 똑같이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다. 외형적인 비례나 동세로 닮아가는 조형을 넘어 작가의 마음과 정신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마애불의 이목구비 각각의 형태와 비례는 빼어나지 않지만, 그 표정은 한없이 맑고 자연스럽다. 이것은 오늘날 자신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성형외과를 자주 드나드는 이들에게 아름다운 얼굴은 적절한 비례나 세부적인 완벽한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듯하다. 넉넉한 마음과 자애로움으로 살아가면 자연스럽고 편안한 얼굴이 만들어진다고 넌지시 일러주는 것 같다.
미술사에서 만나는 백제인들은 매우 창의적인 모습을 지녔다. 건축에서 석탑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만들었고, 금속공예에서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금동대향로를 만들었다. 불상에서도 석불과 마애불을 처음으로 조성하여 한국미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불상의 도상에서도 새로운 형식을 만들었으니 태안마애삼존불이나 서 산마애삼존불의 형식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 기 어려운 새로운 도상이다. 서산마애삼존불은 백 제의 몇 개 안 되는 마애불로 우리나라 마애불을 대표한다. 우리 불교미술에서 표현된 불상 가운데 가장 인간적이고 신비로운 얼굴로 알려져 있다. 이곳 서산마애삼존불은 티 없이 맑은 모습으로 벙긋이 웃고 있는 모습으로 어쩌면 1,300년 전의 백 제 사람을 지금 보는 듯하다.
바위 가운데 본존인 여래, 오른쪽에는 협시보 살이 서 있으며 왼쪽의 협시보살은 반가사유상이다. 본존은 고부조, 좌우협시보살은 중저부조로 조각하였다. 본존과 협시보살상 전체가 풍부한 매스 mass로 이루어져 있지만 디테일에서는 부드러움이 상호의 이목구비에 가득 두드러진다. 둥근 얼굴에는 눈썹, 눈, 코, 입술 등 어느 한 부분의 완벽함이 아닌 전체가 어우러지는 조화로움과 신묘함이 있다.
삼국시대를 비롯한 통일신라 대부분 불상들은 반개한 눈에 고요한 적정의 아름다움을 갖는데 비해, 이곳 본존의 여래상은 큰 눈에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우리 마을 어귀에서 만나는 편안한 이웃의 모습이다. 지금 여기 살아있는 생동감을 가진 쾌활한 모습은 참배자로 하여금 환희심이 나게 한다.
이 마애삼존불은 바위 면을 적절히 이용하여 삼존을 배치하면서 주존은 크게, 좌우 협시보살은 작게 정하고 전체적으로 삼각형을 이루게 하였다.
본존의 주형화염문舟形火焰紋 광배를 꼭짓점으로 하여 양협시의 연꽃좌대를 그려보면 큰 삼각형의 구도를 이룬다.
특이한 점은 삼존의 시선이 각기 다르다. 주불은 환하게 눈을 뜨고 시선은 정면을 향한다. 우 협시보살의 반개한 눈은 정면이되 낮게 아래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좌협시 반가사유상의 시선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제작 기법 면에서는 얼굴이 환조에 가깝게 고부조로 표현되고 그 아래로 내려가면서 중부조, 저부조로 표현된다. 이는 얼굴을 중심으로 한 상체가 두드러지면서 참배자에게 불상의 상반신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효과를 준다. 이러한 제작 태도는 서산마애삼존불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마애불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조형어법으로 정면성과 더불어 마애불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조형어법은 바위에 새겨진 인체가 바위와 일체화되면서 한국조각이 자연주의 미학을 이룬다는 단서를 제공한다.
서산마애불은 삼존불 중앙에 본존의 입상, 그 좌우에 반가사유상과 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특별한 도상을 가진 이 불상은 어 떤 존명을 가질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미술사 가들은 『법화경』에 언급되는 석가모니불과 제화 갈라보살 그리고 미륵보살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로 해석한다. 다르게는 보배구슬(寶珠)를 두 손으로 잡고 있는 우협시보살을 관음으로 해석하여 아미타불(석가모니불)과 관음보살, 미륵보살로 보기도 한다. 후자는 현실적인 우리들의 삶을 더 위로를 주는 해석이다.
이 마애불은 7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 다. 이곳은 서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를 하는 당진 일대로 가는 길목이다. 중국을 오가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당시 수도권인 공주나 부여로 오가는 이들 은 이 마애불에 아무 탈 없이 여행할 수 있게 해달 라는 간절한 기원을 올렸을 것이다.
당시의 사찰이나 불상들은 대다수 사라졌지만 그 중 돌로 만들어진 석불은 당진과 서산 그리고 예산에 마애불로 남아 있다.
서산마애불의 밝고 쾌활한 표정은 당시 백제인의 초상 같은 모습이겠지만, 북위北魏, 제齊, 주불 周佛에서 보는 고식古式인 형식과 함께 법의 옷주름에 있어서 수대隋代까지 내려가는 형식도 보이고 있어,7세기 초엽에 중국의 기존 석불양식의 영향도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외부 양식의 영향은 외형적인 형식에 한정되고 인물 전체에서 우러 나오는 아우라aura는 백제 특유의 미의식으로 이는 한국불상의 조형祖型이라 하겠다.
이렇게 천진스럽게 미소 짓는 모습은 조선시대 배불의 그 엄혹한 시절에도 등이 굽고 두터운 옷과 평면적 불신으로 위축된 조형을 이루었지만 상호만은 천진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시대에 따라 양식이 변하였지만 그 속에 흐르는 미의식은 새로운 조형을 일구어 가면서 한국인의 특유의 조형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도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4회 개인전과 270여 회의 초대, 기획, 단체전에 출품하는 등의 작품 활동을 해왔다. 『한국 마애불의 조형성』 등 다수의 책을 썼고, 현재는 한국교원대학교 미술교육과에서 후학 양성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