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겨울이 오고, 어느새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이곳 따뜻한 남도 땅에도 어김없이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매일매일 기도하시고 열심히 정진하시는 여러 불자님들께 항상 부처님의 가피가 가득하시리라 믿으며 오늘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부처님께서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깨달으신 후, 가장 먼저 설하신 중요하고 성스러운 첫 번째 진리, 곧 초전 법륜인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의미합니다.
“수행자들이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그것은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발생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진리’라는 말을 파자破字해보면 ‘말(言)’과 ‘임금(帝)’이 됩니다. 임금과 말다툼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뜻으로 이 사성제라는 것은 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는 참된 이치라는 것이지요.
| 사별, 그리고 깨달음
사성제는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이며,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입니다. 그중 ‘고성제’에 대해서 저는 일찍이 ‘부처님은 왜 고苦를 성스러운 진리라고 했을까?’ 오랫동안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에는 항상 고통이 있었고 그 고통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까지는 이해하지만 그 고통이 어떻게 성스러운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이 남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서야 저는 고통이 진정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또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제가 운영하고 있는 상담센터에서 가족의 사별 경험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가족들을 모아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습니다. ‘불교의 연기법에 근거한 상담치유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상담 경험을 기반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사별을 경험한 가족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24살 된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접한, 한 어머니가 참석했습니다. 건강했던 아들이 한순간 사고로 죽었다는 말을 들은 그 어머니!
청천벽력 같은 그 소식은 어머니를 하루아침에 까마득한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어머니는 잠시 동안 멍한 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정신을 수습하여 아들을 보러가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아무 정신없이 멍한 채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그녀는 제 정신이 아니었답니다.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슬픔이 더욱 크게 느껴지면서,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이유 없이 남편이 보기 싫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남편 때문에 아이가 죽은 것만 같아 꼴도 보기 싫어지면서 원망의 화살이 남편에게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내가 왜 이럴까? 이러다가는 나머지 가족들까지 모두 잃어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동안 공부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면서 자기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며 슬픔 속에서도 살아있는 나머지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의 고통도 보이기 시작하고, 자식들의 아픔도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서로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고, 지금은 그 가족의 가치를 백배 느끼며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참가자도 있었습니다. 23살의 꽃다운 딸을 심장마비로 잃어버린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이의 죽음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아이를 따라 죽고 싶은 생각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는 딸이 보고 싶을 땐 사진을 꺼내보며 딸을 그리워하곤 하였는데, 어느 날 문득 생각해 보니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항상 사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다음에…. 다음에….”라는 말로 미뤘다고 합니다. “다섯 식구가 함께 가족 여행 한번 못 가보고 그 흔한 외식도 한번 제대로 못 했었다.”며 “바쁘다고 미루기만 했던 그 일이 후회스럽다.”고 회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어머니는 “이제는 일 년에 한번이라도 가족이 꼭 함께 여행을 가겠다.”며 “미루지 않고 맛있는 외식도 그때그때 같이 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 고통에서 배우는 가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으로는 ‘소중한 우리 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이유로 ‘소중함’이라는 말의 무게를 잊지는 않았나요? 이런 사별의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가족이 이렇게나 뼈저리게 소중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까요? 가족은 그냥 가족이라는 이름만으로 존재하며 데면데면, 대충대충, 또 나 중심적인 생각만으로 살고 있지 않았을까요?
며칠 전, 한 모녀가 저를 찾아 왔습니다. 대학 졸업을 하자마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딸을 가진 어머니의 고민 때문이었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딸이 발령받고 근무한 지 2주 만에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사표를 내겠다며 투정을 부린답니다.
만약 그 딸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이 안 되어 수년 동안 취업 준비생으로 고생했으면 어땠을까요? 원하던 취업 자리에서 번번이 낙방하여서 입맛이 없고 피가 마르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했더라면, 그리 쉽게 사표를 내겠다고 투정을 부릴 수 있었을까요?
죽을 만큼 배고팠던 사람만이 밥의 고마움을 진정으로 느끼고, 목마름에 허덕여 본 사람만이 물의 소중함을 느낄 것입니다. 또 뼈가 아리는 추위를 견뎌 본 사람만이 옷과 집의 고마움을 알 것이고, 지독한 외로움을 겪어 본 사람만이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점들로 비추어 보아 삶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예기치 않은 고통들, 그 고통들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 아닐까요?
어떤 분이 뜻하지 않게 고소, 고발을 당하여 재판에 회부되는 고통을 겪으면서 ‘이보다 더 훌륭한 슈퍼바이저가 어디 있겠냐?’ 하셨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분은 고통을 스승으로 삼는 참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고통은 단순히 몸과 마음의 불편함과 괴로움이라기보다 인간이 부딪히는 한계성과 불완전함 등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성제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겪게 되는 그런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진정으로 깊이 들여다 볼 때, 그것은 이미 고통이 아니라 성스러운 가르침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 더 이상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고통이야말로 분명 우리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러 온 부처님 자비의 증표일 겁니다. 스스로 ‘무엇 때문에 고통의 마음이 일어났을까?’ 생각하며 원인을 찾아 지혜로운 방법을 모색할 때, 고통은 성숙으로 가는 길, 도道가 아닐까요?
법당 앞 국화꽃이 지고 있습니다. 찬바람이 불고 생명이 다한 것들이 땅으로 돌아갑니다. 잎이 떨어진 나무는 죽은 듯 앙상하지만 곧 새싹이 돋아날 것을 압니다. 겨울이 지나면 올해보다 더욱 풍성하고 단단하게 성장하겠죠. 늘 그랬던 것처럼.
법문. 지오 스님
무안 봉불사 주지. 1984년 지리산 대원사 성우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89년 자운 스님을 은사로 비구니계를 수계 받았다. 목포 교도소 성폭력 사범 상담 외래 강사, 자비의 전화 이사, 광주 불교방송 ‘그대가 꽃입니다.’ 진행을 맡았었다. 명상심리상담사 1급, 에니어그램 마스터로 현재 명상심리상담센터 ‘쉼’ 원장을 역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