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불교만큼 다양한 교리와 사상을 가진 종교는 없다. 화엄(華嚴)과 같은 고도한 관념철학을 전개하는 사상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적인 구원을 설명하는 정토교(淨土敎)도 있다.
현대심리학의 정교한 이론을 방불하는 유식학(唯識學), 정신적 안심입명을 추구하는 선(禪)과 같은 수행체계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교리와 사상은 너무나 복잡하다. 처음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가 만든, 들어갈 수는 있으나 나올 수는 없는 미궁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불교가 이렇게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교리체계를 가진 것은 학문적 측면에서는 큰 축복일지 모른다. 아무리 캐내도 끝이 안 보이는 연구의 광맥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실천적 입장에서 보면 도리어 약점이 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불교의 정확한 이해를 어렵게 하는 까닭이다.
실제로 불교를 10년 이상 믿어온 신심 깊은 불자라 하더라도 그 교리 이해 수준은 높은 편이 아니다. 심하게 말하면 불교를 믿는 것인지, 아니면 불교와 비슷한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교를 매우 어려운 종교라고 속단하거나 반대로 저급한 미신적 종교라고 외면하기도 한다.
이 같은 극단적인 오해는 역사적으로 그럴만한 배경이 있다. 부처님은 45년 간 전도활동을 하면서 재래의 종교사상을 무조건 배척하지 않았다. 어떤 부분은 포용하고, 어떤 부분은 그 의미를 불교적으로 변화시켰다. 인과응보설이나 이에 바탕한 윤회론, 인도 재래의 우주관이나 세계관의 채용 등이 그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관용적 태도가 뒷날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그 사상적 독창성을 제거하고 혼합주의를 배태시키는 원인이 된 점이다. 특히 대승불교 시대에 이르러서는 변화의 폭이 매우 컸다.
원래 자력적이고 수행 중심적이던 교리는 타력적이고 신앙 중심적인 교리로 바뀌었다. 힌두교의 수많은 신들이 불교신앙 안에 불보살로 포용되었다. 그 절정을 보여준 것이 밀교였다. 자비를 내세우며 타력 구제를 표방하는 정토교의 등장은 불교가 다른 종교사상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는 어떤 것이 불교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교리의 심천론(深淺論)이나 대승비불설론(大乘非佛說論)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중국불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는 새로운 교리해석의 틀을 고안해냈다. 경전에는 내용상 심천이 있고 때로는 상반되는 내용까지 나타난다. 그 이유는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설법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상판석이란 방편론을 전제로 부처님 설법의 선후와 사상의 심천을 구분하는 방법이었다.
근대불교학은 이 같은 중국적 교상판석이 불교사상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탁월한 방법론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모든 교설을 부처님의 친설(親說)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역사적 태도라는 지적 또한 빼놓지 않는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많은 교설은 후대로 오면서 첨삭가감된 것이 많다. 일부는 심각하게 불교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것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서로 다른 견해를 말하는 뿌리도 실은 여기에 있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 한국불교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불교는 전통적으로 대승주의를 표방해왔다. 중국적 교상판석에 근거한 대승불교를 아무 의심 없이 믿어왔다. 극락은 서방정토에 있고,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의 고통을 다 제거해 줄 것을 가르쳐왔고 또 믿어왔다.
적어도 불교학에 역사적 방법론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던 것이 상황이 달라졌다. 현대불교학이 불교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최초기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역사적 변형이 일어난 불교와 최초기의 불교를 대립적으로 비교를 하는 일은 자연스런 현상이 됐다. 이것은 매우 곤란한 문제를 가져왔다. 많은 사람들이 믿어왔던 교리체계나 신앙체계에 일대 혼란이 생겼다. 새로운 교리정보가 새로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알다시피 현대는 국민의 대다수가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로 구성비가 점점 높아지는 사회다. 합리적인 설명이 아니면 설득이 안 되는 시대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대중의 불교이해 수준이 어느 정도로 고양돼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교리해석의 권위를 몇 사람의 학자나 고승에게 독점적으로 허락하지 않는다.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른 양상이다.
사람들은 빙빙 돌리지 않고 아주 직설적으로 묻는다.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이라면 기도나 제사의 방법으로도 도달할 수 있는지, 또는 현재와 같은 참선법으로 부처님 같은 해탈을 얻을 수 있는지, 부처님 당시에도 이와 같은 전통이 있었는지, 있다면 어느 경전에 나오는지 가르쳐 달라!’ 이에 대해 합리적 설명이 부족하면 피식 웃고 만다. 호락호락 쉽게 설득되지 않는 것이다.
출가와 재가의 관계설정 문제도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과거에는 출가가 교리 해석의 독점적 권위를 가졌지만 이제는 다르다. 자료와 정보가 공개됨으로 해서 진리는 사권(師拳) 속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진리 해석의 독점적 권위의 붕괴는 승가 권위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수행과 실천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간화선만이 최고라고 해도 이미 대중의 관심은 남방의 관법수행으로 기울어져가고 있다. 재가법사도 등장했다. 관법수행을 소승선(小乘禪)이라고 말하면 '부처님을 소승이라고 한다면 기꺼이 소승이 되겠다'고 맞선다.
이런 문제는 결코 우열론(優劣論)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역사적 관점에서 ‘선수행의 발달과정’으로 설명해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제는 누구도 과거처럼 무조건 주장만 하다가는 지성의 벽 앞에 비웃음을 사고 만다.
그렇다고 무조건 새로운 시속(時俗)을 따르자니 그 동안의 주장이 허사가 될까봐 전전긍긍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로 인해 심각한 내면적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불교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진퇴유곡의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가?
역사적으로 이런 문제가 닥칠 때마다 불교가 취해온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경전의 결집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던가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교상판석의 확립을 통해 새로운 교리 해석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방법은 이런 여과장치를 거친 교리사상을 근거로 새로운 신행운동을 펼쳐나가는 것이다.
이제 현대의 한국불교도 과거의 선배들이 해왔던 그 방법을 고려할 때가 됐다. 더 이상 방치하면 그야말로 정법인멸(正法湮滅)의 사태가 도래할 수도 있다. 현대에 맞는 새로운 교상판석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물론 현재의 상황에서 이 일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참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자 한다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반드시 해내야 한다. 우리가 고민할 문제는 이미 ‘새로운 교상판석을 세워야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해야 불교의 원점과 교리 해석의 올바른 표준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불교 앞에 높인 사상적 현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현대판 교상판석을 세워나갈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준이 가장 유효한 대안이다. 즉 '부처님 그분은 누구이며, 그분은 어떤 구체적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했으며,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불교는 역사적 실존인물이며 종교적 성자인 고타마 싯다르타의 깨달음과 그 가르침에 바탕한 종교다. 따라서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깨달음과 그것에 근거한 가르침이다. 이 점을 소홀히 하면 아무리 그럴듯한 이름이나 사상체계도 불교라고 이름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람이 어떤 불교를 공부하든 그 원점은 당연히 부처님이 직접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그 불교여야 한다. 그래야 어떤 시대적 사상적 환경에서도 불교의 정체성과 독창성을 유지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런 태도가 지나치게 부처님 그분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불교라고 부르는 종교’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굴절과 변화를 거친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다. 인간으로 실존했던 역사적 부처님이 직접 말하고 행동하며 가르친 진리로서의 불교다. 그것을 통해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당연하다.
미궁에 들어갔던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를 구원해준 것은 그를 사랑한 공주 아리아네트가 준 실타래였다.
현대에 이르러 불교라고 부르는 종교의 복잡해진 사상의 미로, 교리의 미로를 벗어날 방법은 ‘부처님이 가르친 불교'라는 실타래다. 이것이 아니면 온갖 이상한 주장과 학설로 머리가 복잡해진 사람들이 쉽게 미로를 빠져나올 ‘끈’이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주장이나 학설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佛敎)' 그 자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불교도가 추구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 가지뿐이다. 《서유기》의 주인공 삼장법사처럼 참다운 불법이 담긴 ‘진경(眞經)’을 갖는 것이다. 그 진경을 찾아 이제 다시 천축으로 가는 십만팔천리의 고행길에 나서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홍사성(본지 편집위원)
출처 : 불교평론 현대적 교상판석을 세워야 할 이유 / 홍사성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