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생활 1년쯤 되었을 때, 고전 리라이팅 시리즈 업무를 맡았다. 대학에서 철학과를 기웃거린 전력이 있어서였을 텐데, 그 일을 맡고서 적잖이 반가워했다. 대학생 때 안 한 공부를 이어갈 수 있겠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첫 작업은 시리즈의 12번째 책 2교. 요즘 핫한 저자인 노명우가 (대학생 때부터 나와 질긴 인연이 있던) 『계몽의 변증법』을 리라이팅한 글이었는데, ‘그 책이 이런 내용이었구나’ 하고 무릎을 치며 작업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작업 이후 신기한 일도 벌어졌는데,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노명우란 이름에 슬며시 밀려나 관심 목록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이럴 때 소크라테스라면』의 원제는 ‘Plato for everyone’이다. 직역하면 ‘모두를 위한 플라톤’쯤 되겠는데, 고대 그리스의 역사, 문화, 예술, 종교 따위에 관한 지식이 없는 독자라도 플라톤 대화편을 맛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저자의 의지 표명 정도로 읽힌다. 이를 위해 저자는 글 속 인물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의 뼈대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바꿨다. 플라톤이 우리 시대 인물이라면 대화편을 이렇게 썼겠지 싶을 정도로.
그런데 플라톤 대화편 ‘리라이팅’을 읽을 ‘모두’라니? 어느 철학자들의 별이라면 모를까, 지구에 그런 ‘모두’가 있을 리 없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사심 가득한 편집에 착수했다. 원고를 읽으며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떠올라 소크라테스에게 속으로 대들기도 하고, 결코 쿨할 수 없는 나를 돌아보며 굳이 쿨해질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하고, 매 순간 성찰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의 무게에 짓눌리기도 하고,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를 떠올리며 나라면 과연 양심을 선택했을까를 자문하기도 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한 꺼풀 벗고서 자신감이 1그램 정도 늘기도 한 내 경험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일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려면 독자와 함께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을 제시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럴 때 소크라테스라면’이라는 제목을 떠올린 순간에는, 독자들이 기꺼이 그 상황 속으로 뛰어들어 소크라테스와 논쟁을 벌일 거라고, 논쟁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 발견을 발판 삼아 한 걸음 내딛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독자가 이 책을 자기 식대로 읽고 제멋대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이른바 ‘고전 리라이팅’이란 어떻게 써야 좋을지를 생각해본다. 뼈를 살리되 살은 새로 붙이기, 다시 말해 원전에 담겨 있는 생각들의 세밀한 흐름뿐 아니라 생각과 생각의 부딪힘을 오늘의 말로 고스란히 살려내기, 그럼으로써 동시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눈, 귀, 코, 혀, 몸으로 그 뼈를 어루만질 수 있도록 하기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쓰는 건 그냥 자기 글을 쓰는 거와 마찬가지 아닌가. 고전 리라이팅이 필요하기는 한 걸까? 고전이란 단지 글감일 뿐이지 않을까?
* 출판 전문 잡지 <기획회의>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