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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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
  • 불광출판사
  • 승인 2016.10.0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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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
 
| 판사에서 엿장수로
1925년 음력 7월 8일,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普雲庵에 엿판을 짊어진 서른여덟 청년이 들어섰다. 보운암 큰방에는 스님들이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었다. 낯선 나그네가 엿판을 짊어지고 산사에 찾아온 것이 하도 신기했던지 한 스님이 엿장수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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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깊은 산골에 엿장수가 무엇하러 왔소?”
“금강산 도인, 석두 스님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어디서 왔소?”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유점사에서 여기까지 몇 걸음에 왔소?”
“… …”
엿장수는 엿판을 짊어진 채, 곧장 큰방에 들어가 한 바퀴 삥 돌고서, 
“이렇게 왔습니다.” 하였다. 
큰방에 있던 스님들이 한바탕 웃으며 말한다. 
“10년 공부한 수좌首座보다 낫네.”
 
이날로 삭발, 오계를 받고 법명을 원명元明이라 불렀다. 이때 나이 서른여덟. 엿판을 짊어진 청년 이름은 이찬형李燦亨 훗날 효봉曉峰 스님이고, 그 청년에게 묻던 이가 바로 ‘금강산 도인’ 은사 석두(石頭, 1882~1954) 스님이었다. 효봉曉峰은 뒷날 송광사에 있을 때 지은 법호다. 이찬형은 이곳에서 전국을 떠돌았던 엿장수 3년의 방랑을 끝냈다. 
 
이찬형.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성리 금성동에서 태어났다. 수안遂安 이씨李氏 병억炳億을 아버지로, 김씨를 어머니로 5형제 중 3남으로 출생했다. 찬형은 어려서부터 유달리 영특하여 이웃 간에는 신동으로 알려졌다. 열두 살 때까지 선비인 할아버지로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워 익혔다. 그는 평양고보를 1회로 졸업한 뒤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 스물여섯 살에 졸업하고 귀국, 서른여섯 살 때까지 10년간(1913~1923) 경성지법과 함흥지법에서 판사를 거쳐 평양의 복심법원(지금의 고등법원)에서 판사를 역임했다. 이때는 일제의 잔악한 식민지 정책이 극에 이른 시기였고, 중국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뜻있는 인사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독립의 기치를 들던 때였다. 
 
판사 이찬형은 바로 이런 시절에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독립지사와 애국지사들을 심판하는 사법기능의 한 자락을 맡았다. 민사재판을 맡던 그가 평양 복심법원 판사로 승진하면서 형사사건을 맡게 되자 이른바 ‘사상범’을 벌주어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의 하루하루 생활이 얼마나 고뇌였고, 화려한 지옥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시인 고은은 효봉 스님을 시봉하면서 이때의 이야기 한 토막을 이렇게 들었다고 회고한다. 
 
“내가 말이다. 평양에서 그놈의 판사질을 할 때 대동강 물이 붉었단다.”
“?”
“대동강 물이 푸르면 푸르지 왜 붉었겠니? 내가 거의 날마다 기생집에서 살아야 했지. 어떤 때는 기생을 데리고 대동강에 나가 뱃놀이도 했단다. 그런데 하도 주색에 빠진 몸이라 그 푸른 강물에 주르륵 코피를 쏟아부어 강물이 붉었단 말이다. 아이고, 그놈의 판사 노릇이라는 게 기생 서방 노릇이야.”
 
| 금강산 도인과 만나다
1923년, 그는 처음으로 항소심의 일반 흉악범에게 사형을 언도해야 했다. 그 항소심이 끝난 뒤 그는 아주 심각한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인간이 어떻게 한 인간을 사형시킬 수 있는가! 인간이 인간을 죽이다니, 과연 이런 일이 법의 이름으로 가능한 것인가!’ 그는 이제까지의 실정법 직업에 회의를 일으킨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자신의 오뇌懊惱 때문에 밥도 먹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세속의 아들 차남 이영실李永實은 “내가 어려서 들은 바로는 아버님께서는 출가 직전에 밤이 오면 밤새도록 주무시지 못하고 괴로워 하셨답니다. 그러니 어머님께서도 한숨 쉬는 소리만 들으며 꼬박 밤샘하셨지요.”라고 증언한다.  
 
판사 이찬형은 몇 날 몇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면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회의하고, 인간사회의 구조에 대해 고뇌한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아내와 세 자녀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비장한 결의는 마침내 그에게 사표도 내지 않은 채 그 직업을 팽개치고 가족으로부터도 떠나게 했다. 이때부터 이찬형은 법복을 벗고, 조선 팔도를 떠돌았다. 누더기 엿장수의 뒤를 따르는 시골 아이들에게 엿을 거저 나눠주다가 밑천이 떨어지기도 했다. 먼 길을 갈 때는 굶기가 일쑤여서 한때는 엿판에 콩을 넣고 다니다가 시장하면 솔잎과 함께 물에 불린 콩을 씹으며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산길을 잘못 들어 비를 맞아가면서 밤을 지새는 일도 있었고, 술에 취해 얼음 위에서 자다가 얼어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시집 가는 새댁의 농짝을 져다주고 먹을 것을 얻기도 하고, 어느 마을에 가서는 한동안 서당 훈장 노릇도 했다. 하루에 2백리에 가까운 길을 그 어떤 환상에 사로잡혀 줄달음치고 나서 발병이 나기도 했다.   
 
한번은 울산을 지나는 길이었는데, 방어진 바닷가에 가니 깔끔한 바둑돌이 하도 좋아 그걸 줍기에 정신이 없었다. 뒤늦게야 둘레에 밀물이 들어온 줄 알고 허둥지둥 뛰어나와 겨우 위기를 모면하였다. “엿장사를 안 하고 바둑돌 장사를 하오?”라고 누가 물을라치면 “엿을 팔 때는 엿장수요, 바둑돌을 팔 때는 바둑돌 장수지요.”라고 응수하였다. 그의 방랑은 스스로 선택한, 자기 자신을 가누는 고행길이다. 효봉 스님의 상좌인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은 그의 방랑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제자리에 꽂히지 못하면 방황하기 마련이지요. 선승禪僧을 법관의 자리에 앉혀 놓았으니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효봉 스님의 방랑은 자신이 꽂힐 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헤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시인 고은은 이렇게 말한다. “효봉 스님의 출가는 극적인 전환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탈바꿈이었다. 본질은 선승禪僧인데 법관으로 잠시 가탁假託돼 있었던 것이다.”
 
3년을 정처 없이 헤매던 이찬형의 발걸음이 마침내 금강산 유점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금강산에 도인 스님이 계시다고 해 찾아왔다 하니, 신계사 보운암에 석두 선사가 계시다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엿장수 이찬형은 그길로 하룻길이 창창한 신계사 보운암으로 찾아갔다. 이렇게 이찬형과 석두 스님은 만난다. 만날 사람끼리 만난 것이다. 이찬형은 비로소 내 갈 길이 바로 여기였구나, 하고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효봉 스님은 계를 받고, 이후 이 날만 되면 새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 까닭을 물으면, “오늘이 바로 내 생일이다.”고 했다. 오늘 한국불교의 적지 않은 스님들이 속가俗家의 생일을 생일로 하여 생일 밥을 차리는 일이 빈번한 것을 비춰볼 때, 효봉 스님의 생일관은 울림이 크다. 또 효봉 스님은 출가 이전을 언제나 전생前生이라고 말한다. 고은의 말에 따르면 효봉 스님은 전생의 어떤 일을 말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 효봉 스님이 판사 노릇을 했다든지, 일본 유학을 했다든지 하는 일이 거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그런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1956년 5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申翼熙, 1894~1956)가 호남선에서 급사했을 때 그 소식이 미륵섬 산중까지 며칠만에 알려졌다. 그때 스님은 회상하듯 그가 와세다 대학을 다녔다는 얘기를 했고, 이어서 김병로(金炳魯, 1887~1964)가 신출내기 변호사 노릇을 했다는 얘기도 문득 흘러나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법원이 지금 있는 데가 아니었지. 화신 근처였어. 그런데 김병로가 명륜정明倫町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는데 그때 푼수로는 삼류였지. 그러다가 차차 그 사람의 이름이 나기 시작했지 …. 참, 해공海公? 신익희? 그 사람이 평산 신씨지. 황해도 평산 말이야. 음, 해공이 그렇게 가버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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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 한 벌, 방석 석 장, 1일 1식
서른여덟에 5계를 받고 중이 된다는 것은 불가에서 흔히 말하는 ‘늦깎이’였다. 스님은 남보다 늦게 출가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잠잘 시간에도 자지 않으면서 분발, 깨달음을 위한 좌선坐禪에만 전념했다. 그의 수행은 치열한 독각獨覺 정진이다. 한번 앉으면 일어날 줄 모르고 누울 줄 모르는 그것이다. 장좌불와長坐不臥. 효봉의 가풍이 여기서 비롯된다. 
 
스님은 계를 받은 그해 보운암에서 여름과 겨울을 지내고 나서 이듬해 여름에는 여러 곳의 선지식을 친견하기 위해 행각의 길에 나선다. 은사 석두 스님은 숨겨 두지 않고 방척했다. “그대가 만나고 싶은 법을 만나고 그대가 보고 싶은 부처를 천하에 주유하여 보게나.” 하고 일러 주었다. 스님은 이런저런 소문을 듣고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남쪽으로는 통도사 내원암에서 백용성(1864~1940) 선사를 만나고, 북으로는 수월(1855~1928) 스님을 찾아 간도 용정 용주사까지 두루 찾아다닌다. 이는 어쩌면 고타마 싯다르타가 출가 이후 여러 스승을 찾아 가르침을 구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효봉 스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결국, 이 집안 수행의 일은 남의 말에 팔릴 게 아니라, 나 자신이 실지로 참구하여 실답게 깨달아야 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그 이듬해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와 토굴 속으로 ‘무無’의 정진에 들어갔다. 스님은 1927년 여름 신계사 미륵암 선원에서 안거에 들어갈 때 미리 정진 대중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는 반야에 인연이 엷은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을 할 수 없습니다. 묵언을 하면서 입선入禪과 방선放禪, 행선行禪도 하지 않고 줄곧 앉아만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궁둥이 살이 허는 줄도 몰랐다. 발가락이 문드러지는 줄도 몰랐다. 한번은 공양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엉덩이에 무엇인가 달라붙는 것이 있어 뒤돌아보니, 엉덩이 살이 헐어서 그 진물이 흘러 옷과 방석이 달라붙어 있었다. 한번 앉으면 궁둥이 살이 짓물러 방바닥에 눌어붙은 줄도 모를 만큼 정진했다는 것이다. 이 때 효봉 스님이 얻은 별명이 바로 ‘절구통 수좌’다. 상좌인 고은은 스님의 정진 흔적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스님을 모시고 목욕을 할 때 그 궁둥이와 발가락, 발바닥에 그 고행의 자취가 역력히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스님은 금강산에 있는 선원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정진을 계속했다. 출가한 지 다섯 해.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스님은 초조했다. 자신의 두터운 속세의 업장과 무능을 한탄했다. 대중이 여럿이서 거처하는 초소에서는 마음껏 정진하기가 어려웠다. 법기암法起庵 뒤에 단칸방의 토굴을 지었다. 한구석에 대소변 구멍을 내고 밥그릇이 들어올 작은 구멍을 냈다. 그리고 스님이 토굴에 들어온 뒤 밖에서 벽을 발라버리도록 했다. 그는 진리를 위해 스스로 갇혀버렸다. 1930년 늦은 봄. 그의 나이 43세. 그는 여기서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다시는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결사적인 각오를 한 것이다. 마치 고타마 싯다르타가 보리수 나무 아래서 6년 고행을 시작할 때 다짐했던 그 맹세와 같은 것이다. 
 
옷 한 벌. 방석 석 장. 1일 1식. 오직 화두 무자無字 하나. 그게 전부다. 스승 석두 선사는 이런 그를 위해 하루에 한 끼 공양을 토굴 안으로 들여 주었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주는 일을 도왔다.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길이 없다. 오직 하루 공양 그릇이 비워졌을 때,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이런 정진은 1년이 지나고, 다시 새로운 1년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년 반이 지날 무렵, 토굴 벽이 무너진다. 효봉 스님 스스로 벽을 차 무너뜨린 것이다. 
 
때는 1931년 여름. 마흔 다섯. 과거의 무수한 수행자들이 이 길을 걸었고, 앞으로도 그렇다. 긴 손톱, 긴 발톱, 긴 수염과 머리칼, 세수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는 오도송悟道頌을 불렀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海底燕巢鹿抱卵 
火中蛛室魚煎茶
此家消息誰能識
白雲西飛月東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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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암, 만공 그리고 효봉
1931년 겨울. 스님은 만공(滿空, 1871~1946) 선사를 조실로 모시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입승 소임을 보며 지낸다. 하루는 뜻밖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평양 복심법원 시절의 동료였던 일본인 판사를 만나자 엿장수가 아닌 판사였다는 사실과 함께 과거 이력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때부터 스님에게는 ‘판사중’이라는 별명이 또 생기게 되었다. 판사라는 과거 이력이 밝혀지자 스님은 금강산도 이젠 인연이 다 되었나 싶어 남방으로 다시 운수행각雲水行脚을 떠났다. 그는 당대의 선지식 용성, 해월, 수월, 만공, 한암 선사 등을 두루 참방하고, 그 회상에서 안거했다. 1935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오대산 상원사에서 정진한다. 이때 스님은 상원사 조실인 한암(漢岩, 1876~1951) 화상으로부터 포운泡雲이라는 법호와 함께 다음과 같은 게문을 받는다. 
 
망망한 큰 바다의 물거품이요
적적한 깊은 산봉우리 구름이여
이것이 우리 집의 다함없는 보배
시원스레 오늘 그대에게 주노라.
 
茫茫大海水中泡
寂寂深山峰頂雲
此是吾家無盡寶
灑然今日持贈君
 
1936년 겨울 안거는 덕숭산 수덕사의 정혜사 선원에서 만공 선사를 모시고 지냈다. 이때 스님은 해제를 맞아 만공 선사에게 선옹船翁이라는 법호와 함께 다음과 같이 인가를 받았다. 
 
치우치지 않은 바른 도리를
이제 선옹자에게 부촉하노니
밑이 없는 그 배를 타고
흐름을 따라 미묘한 법을 드러내라.
 
無偏正道理
今付船翁子
駕無底船
隨流得妙也
 
당대의 선지식 한암 스님과 만공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한암과 만공은 ‘한국선의 중흥조’라고 일컫는 경허(1849~1912)의 법맥을 이은 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를 보면 경허의 법맥이 효봉에게 이어졌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1937년 나이 50세가 되던 해 스님의 운수행각의 길은 보조(1158~1210) 국사의 정혜결사 근본도량인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렀다. 스님은 “처음 찾아간 절인데도 옛집처럼 아주 익숙하다. 틀림없이 전생에 오래 살던 도량이었을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끔 말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스님은 10년 동안 삼일암三日庵에 주석하면서 많은 청풍납자들을 제접提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불일보조 국사의 목우가풍牧牛家風과 정혜쌍수定慧雙修, 조계선풍曹溪禪風을 오늘날에 계승하고 재현하려는 원을 세운다. 이 시대에 필요한 현전승보現前僧寶를 양성하고 제2의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전개하여 불교의 중흥中興과 선풍진작禪風振作을 위하여 조계산 송광사를 옛날의 해동제일도량답게 장엄하고, 16국사를 배출한 승보도량답게 중흥키 위한 염원으로 운수행각의 길을 멈추고 송광사에 주석住錫하였다. 송광사 삼일선원 회주와 조실을 역임하면서 스님의 가풍과 사상도 여기에서 형성되었다. 이해 음력 4월 8일 스님의 맏상좌인 구산(1909~1983) 스님이 출가했다. 
 
| 삼일암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하다 
1938년, 삼일암에 주석한 지 한 해가 지났다. 보조 국사의 16세 법손인 고봉 국사가 음력 4월 28일 새벽녘의 꿈에 나타나 몽중법문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새로운 법호와 함께 스님께 전한다. 이때부터 원명元明 운봉雲峰을 학눌學訥 효봉曉峰으로 바꾼다. 
 
번뇌가 다할 때 생사가 끊어지고
미세히 흐르는 망상 영원히 없어지네.
원각의 큰 지혜 항상 뚜렷이 드러났거니
이는 곧 백억의 화신불이 나타남이여.
 
煩惱盡時生死絶
微細流注永斷滅
圓覺大智常獨存
卽現百億化身佛
 
스님은 삼일암에서 조실로 10년을 머물면서 정혜쌍수定慧雙修에 대한 확고한 구도관이 형성된다. 스님 자신이 계정혜 삼학을 갖추어 닦았고, 후학들에게도 이를 적극 권장하였다. 
 
“만일 이 일을 이야기한다면, 삼세 모든 부처님도 이 문으로 드나들었고, 역대 조사도 이 문으로 드나들었으며, 천하 선지식도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 여기 모인 대중은 어떤 문으로 드나들려는가? 이 문이란 계율, 선정, 지혜의 삼학三學을 가리킴이다. 이 삼학은 마치 집을 짓는 것과 같으니 계율은 집터와 같고, 선정은 재목과 같으며, 지혜는 집 짓는 기술과 같다. 아무리 기술이 있더라도 재목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고, 또 재목이 있더라도 터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삼학을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 삼학을 함께 닦아 쉬지 않으면 마침내 정각正覺을 이루게 될 것이다.” 
1946년 음력 7월 15일. 스님은 하안거 해제일을 맞아 송광사 삼일선원에서 3년을 기한으로 정혜결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시기 교단은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대작불사가 시작된다. 바로 해인사에 출가 수행승의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을 개설한 것이다. 이때가 음력 10월 15일. 스님은 가야총림의 최고 지도자인 방장화상方丈和尙으로 추대된다. 이듬해 1947년 가을에 성철, 청담, 자운 등의 스님들이 봉암사 결사를 시작한 것을 볼 때 해방 이후 한국불교 교단은 수행 전통을 잇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해인사로 가기 전 효봉 스님은 10년 동안 머물던 송광사를 떠나는 심정을 이렇게 남긴다.  
 
내가 송광사에 온 지 어느덧 십 년
옛어른들 품 안에서 편히 자고 먹었네
무슨 때문에 이 조계산을 떠나는가
인간과 천상의 큰 복밭을 갈기 위해서라네.
 
我來松廣今十年
國老懷中安食眠
曹溪一別緣何事
欲作人天大福田
 
스님은 이 표현처럼 ‘인간과 천상의 큰 복밭을 갈기 위해’ 가야총림으로 수행처를 옮긴다. 이는 송광사에서 시작한 정혜결사를 접고 싶지 않은 마음과 교단으로부터 부여받은 한국불교 인재불사의 요청 사이에서 적지 않은 고뇌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낳게 한다. 이는 송광사를 떠나면서 스님이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  
 
| 사무량심과 자리이타의 길
가야총림은 1946년 겨울 안거부터 1950년 여름 6・25 전쟁으로 총림이 흩어질 때까지 5년 동안 한국불교 수행승의 모범도량으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근래 한국 고승들의 젊은 시절 요람이었고, 뒷날 교단 정화운동의 역군들도 대부분 이곳에서 착실하게 수도하던 인재들이다. 이때 손상좌인 보성 스님이 입산한다. 오늘날 가야총림에서 행한 법어가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은 바로 보성 스님이 효봉 스님께 ‘뚝밤’을 맞아가며 받아 적은 덕이다. 효봉 스님 수행의 결기가 엿보이는 가야총림 첫 겨울 안거(1946.10.15.) 때 쓴 ‘해인사 가야총림 방함록 서序’를 보자. 
 
“여기에 뜻을 둔 사람은 인정人情에 얽매이지 말고, 사자獅子의 힘줄과 코끼리의 힘으로 판단하여 지체없이 한칼로 두 동강을 내야 한다. 용맹하고 예리한 몸과 마음으로 지금까지의 비린내 나는 장삼과 기름기에 전 모자를 벗어 던지고, 천지를 덮는 기염을 방출放出하고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는 위광威光을 발휘해야 할 것이니, 그래야만 그와 벗할 수 있고 또한 씨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스님은 1949년 하안거 해제 법어에서 출가란 무엇인가를 묻고, 사무량심과 자리이타행의 길이 가리킨다. 
 
“출가出家한 대중은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의식衣食을 구하려 하는가, 명리名利를 구하려 하는가, 재색財色을 구하려 하는가? 그 모두가 아니라면 그럼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오직 한 가지 일(一大事)이 있으니 이제 내가 그대들을 위해 말하리라. 자기 한 몸만을 위해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으며 계율을 지키고 아란야(阿蘭若 : 寂靜處)에 살면서 해탈을 한다면 그것은 참 출가出家라 할 수 없다. 크게 정진하는 마음을 내어 일체 중생의 번뇌를 끊고, 계율을 깨뜨리는 이로 하여금 청정한 계율에 머물게 하고, 생사에 윤회하는 중생들을 잘 교화하여 해탈을 얻게 하며, 광대한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 : 慈悲喜捨)으로 일체 중생을 두루 이롭게 하고, 일체 중생들을 모두 큰 열반에 들게 하여야 비로소 참 출가出家라 할 수 있다. 자기 한 몸만의 해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自利, 이타利他의 행이 원만하여야 마침내 유한遺恨이 없을 것이다.” 
 
또 스님은 1950년 하안거 결제 법어에서 수행자의 공부 길을 이렇게 전한다
“우리 형제들이 삼 년이나 몇 십 년 동안에 바른 눈을 밝히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소견에 집착하기 때문이니, 그럴 때는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공안公案을 결택決擇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에 그런 선지식이 없을 때에는 고인古人의 어록語錄으로 스승을 삼아야 하느니라. 또 우리가 날마다 해야 할 일은 묵언默言하는 일이니, 아는 이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이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의 말에,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가는 곳마다 걸린다.’고 하였으니 이 어찌 믿지 않을 것인가.”   
 
가야총림은 1950년 겨울 6・25 전쟁으로 더 이상 대중이 머물 형편이 되지 못하게 되어 운영을 멈춘다. 스님도 부산 동래 온천동 금정사에서 동안거를 맞이했다. 1951년 동안거 해제일을 맞아 상좌인 구산 스님에게 전법게를 전한다. 그해 여름부터 1954년 3월까지는 통영 용화사 도솔암과 용화사 뒤 토굴에서 안거한다. 도솔암 시절에는 탄허(1913~1983), 월산(1912-1997) 스님 등이 스님의 회상에서 함께 살았다. 
 
1954년 여름철부터는 같은 미륵산 너머에 구산 스님의 원력으로 미래사彌來寺를 세우고 그곳 토굴에 머물렀다. 이때 조실로는 효봉 스님, 선덕 계봉, 상좌 향봉, 구산, 지환, 혜융, 법달, 활연, 원명, 법정 스님이 미래사 대중으로 있었다. 이 즈음 법정 스님이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1954)했고, 환속한 시인 고은이 1955년에 효봉 스님의 권속으로 들어왔다. 고은에 따르면 미래사 대중들은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지켜 하루에 먹을 것을 짓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원칙을 거의 일상으로 삼아 밭을 일구고 감자를 심고 이것저것 채마와 고소까지 심었다.”고 회상하며, 이렇게 언급했다. 
 
“우린 토굴문중이었다. 하루 한 끼 먹으며 철저히 수행중심으로 살았다. 스승은 겸손하고 온화했다. 목소리도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새벽 3시 기상 시간만은 추상같았다. 쩌렁쩌렁 맹수소리로 잠을 깨웠다. 날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생일을 기억했다가 국수와 떡도 해줬다. ‘오늘은 국수 먹기 좋은 날’이라며 만들게 하곤, 나중에 ‘네놈 귀빠진 날’이라고 알려줬다. 어느 꽃피는 봄날, 일렁거리는 춘심에 내 젊음이 폭발했다. ‘부처가 되면 뭐 하냐’며 선방의 구들장을 뜯어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러자 스승은 ‘맞다! 그거 돼서 뭐 하냐, 잠이나 자자’며 벌렁 드러누웠다. 한방 크게 얻어맞았다. 난 울면서 구들장을 다시 가져다 놓고 잘못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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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계율, 시주의 은혜에 엄격하다 
효봉 스님은 1954년 8월 교단의 정화운동으로 그토록 발 딛기를 꺼려하던 서울로 올라와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며 정화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1955년 9월까지 머물렀다. 당시 정화운동에는 동산, 금오, 청담 스님이 함께 했는데, 스님은 당시 정화운동이 비구와 대처 간의 ‘절 뺏기 싸움’으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했다. 비구승측은 숫자도 적고 본분이 수도에 있어, 사판 일에 서투르니, 3본산만 맡아 가지고 거기서 착실히 수행하면서 힘 따라 서서히 정화를 하자는 입장이었다. 
 
서울에 머물고 있을 무렵,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의 생일 초대를 받고 종단을 대표해서 경무대景武臺로 축하인사를 가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즐비하게 옹위한 가운데서 고관대작들이 드리는 인사를 턱끝으로 받고 있는 이 박사는 스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벌떡 일어나 손을 마주 잡고 앉을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이 박사가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의 생일은 언제입니까?”
 
이때 스님은 이 박사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생불생生佛生 사불사死佛死,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데 생일生日이 어디 있겠소?”
 
이 말을 들은 노老 대통령은 정색을 하고 입안으로 ‘생불생生佛生 사불사死佛死’를 거듭거듭 뇌었다. 그러고는 스님이 나오는데 따라 나오면서 귓전에 대고, “우리나라에 도인道人이 많이 나오게 해 주시오.”라고 했다.  
1956년 효봉 스님은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한 철을 살았는데, 그때 시자 한 명만 데리고 갔다. 그가 법정 스님이다. 그는 당시 효봉 스님과의 일화 한 토막을 이렇게 전한다. 
 
“스님은 털끝만한 것도 부처님의 계율에 어긋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특히 시간관념은 너무도 엄격했다.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스님을 모시고 지낼 때, 동구에 찬거리를 구하러 내려갔다가 공양 지을 시간 단 10분이 늦어 돌아왔는데, ‘오늘은 공양을 짓지 마라. 단식이다! 수행자가 그렇게 시간관념이 없어 되겠느냐.’ 하며 용납하지 않았다. 스님은 또 시주의 물건에 대해서도 인색할 만큼 아끼었고, 시주의 은혜를 무섭게 생각했다. 우물가에 어쩌다 밥알 하나만 흘러도 평소에 그토록 자비하신 분이 벌컥 화를 내곤 하셨다. 초 심지가 다 타서 내려앉기 전에 새 초를 갈아 끼지 못하게 했다. 그러므로 생활은 지극히 검박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인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곧 부자 살림이라고 항상 말하였다. 금강산 시절부터 쓰던 다 닮아진 세숫비누를 쌍계사 탑전에 와서 쓸 만큼 철저했다. 무더운 여름날 단 둘이 앉아서 공양을 하면서도 가사와 장삼을 입고, 죽비를 쳐서 심경(心經, 식당작법)을 외우면서 엄숙히 음식을 먹었다.”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제4대 종정으로 추대되었고,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에 주석했다. 이 즈음에 효봉 스님의 마지막 상좌인 법흥 스님이 출가했다. 1960년에는 “수행이 없는 포교란 있을 수 없다.”면서 여름철 안거부터 3년간 통영 미래사 토굴에서 주석했다. 2년 후인 1962년 4월 11일, 마침내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한다. 스님은 통합종단 초대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스님은 통영 미래사에 머물면서 정진을 계속하였다. 이후 건강이 나빠지자 1963년 10월 제자인 구산 스님이 주지로 취임한 동화사로 옮겨 1966년 5월 13일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이 무렵 법정 스님은 은사의 생활을 이렇게 적었다. 
 
“(스님은) 대중생활을 하지 못했다. 특히 치통으로 많은 고생을 치러야 했다. 스님의 성격은 천진한 어린애처럼 풀려 시봉들과 장난도 곧잘 했다. 육신의 노쇠에는 어쩔 수 없는 것, 무상하다는 말은 육신의 노쇠를 두고 하는 말인가. 스님은 가끔 ‘파거불행破車不行이야.’라고 독백을 하였다.”
 
1966년 5월 14일 거처를 대구 동화사에서 밀양 표충사 서래각으로 옮겼다. 건강이 기울기 시작했다. 곁에서 지켜보기에 이 세상 연이 다해 가는 듯했다. 1966년 10월 15일(음력 9월 2일)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고 평소 습관처럼 가부좌를 한 채 79세로 입적했다.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  
 
吾說一切法 
都是早騈拇
若問今日事 
月印於千江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고 인용했다. 
曉峰門徒會, 『曉峰法語集』, 불일출판사, 1975
法頂,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불일출판사, 1984
法興 엮음, 『禪의 世界』, 호영, 1992
高銀, 『나 高銀』, 민음사, 1993
최종고, 『한국의 법률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김용덕, 『효봉 스님 이야기』, 불일출판사, 2008
범일보성, 『나에게 가는 길, 청소』, Y브릭로드, 2009
임혜봉, 『종정열전』, 문화문고, 2010
조계총림 송광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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