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
저는 전생에 지은 업을 현생에 받는다는 것이 너무 억울합니다. 그 생의 벌을 그 생에 받는다면 뉘우칠 수도 있겠지만, 기억도 못하는 전생의 과보를 현생에서 받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회의 근본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A1. 윤회의 목적은 우리를 적절하게 배우고 깨닫게 함으로써, 우리를 귀의(歸依)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귀의, 즉 근원인 자성의 바다로 되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삶의 목적입니다. 어리석은 중생이 지혜로운 붓다라는 본질로 되돌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저 언덕[彼岸]’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바라밀행, 즉 피안으로 가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귀의로써 본질로 되돌아가고 마침내 부처가 될 것이지만, 우리는 수행을 통해 그것을 조금 더 앞당길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수행자가 아닐지라도 우리의 본업은 수행자입니다. 누구나 삶 자체를 통해서 배우고 깨달아 결국에는 완전한 불성과 하나가 되는 귀의를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윤회는 바로 이러한 귀의의 여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법칙입니다. 즉, 윤회를 통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괴롭히고 죽였다면, 자신 또한 똑같이 당한다는 윤회와 업보의 법칙을 통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동 체대비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점차 성숙하고 진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업을 짓자마자 벌을 받게 된다면, 그 사이에 삶의 의미를 깨우치고 깨달을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업보를 받아 괴로운 일을 당했을 때 거기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애쓰지 말고, 먼저 충분히 그 업보와 함께 있으라고 이야기합니다. 받아들이고 잠시 함께 있음으로써, 내가 지은 업을 책임감 있게 받겠다는 자기 다짐과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고 이로써 삶을 배우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업보 사이에는 적절한 시간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업에 대해서 배우고 깨닫기 가장 적절할 때에 보(報)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사실 보를 이번 생에 받으나 다음 생에 받으나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높은 차원에서 본다면 생사는 별 의미가 없으며, 어차피 삶은 계속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저 다음 생에 받음으로써 더 많은 이익이 있을 경우에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가 전생을 다 기억한다면 어떨까요? 그 무서웠던 현장들, 나를 괴롭히고 또 내가 괴롭혔던 모든 일들을 다 기억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 채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는 우주법계가 우리에게 내려준 감사하고 자비스러운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2. 저는 한 번도 제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항상 주변 사람을 배려하다 보니 정작 제 생활이 없습니다. 엄마나 언니가 힘들까봐, 언니 아이들 보살피는 일이며 집안일까지 전부 제가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힘든 걸 보기 싫고 성격상 모질게 거절도 못하는 체질이지만, 그러면서도 ‘내 인생은 왜 이런가’ 하는 생각에 한없이 슬프기도 합니다. 스님,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A2. 너무 착하셔서 나쁜 말도, 거절도 잘 못하시는군요. 본질적으로 본다면, 이렇게 살아도 좋고 저렇게 살아도 좋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만이 잘 사는 것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삶 속에서 만족하고 행복해 하며 살고 있느냐 하는 태도, 마음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남을 보살피며 스스로 행복해 하고, 이렇게 도울 수 있음에 만족하며 그 안에서 삶을 경험하고 누리며 받아들인다면, 그런 삶 도 좋습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돕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힘들어하며 ‘난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부정, 불평, 거절, 거부 등을 연습하게 되는 것이기에 결국 내 삶이 더욱 불행해지고 남에게 종속돼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삶을 받아들이더라도 주체적이고 주도적으로 주인이 되어야 하고, 거부하더라도 스스로 주인이 되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 스스로의 감정, 마음자세 등이 씨앗이 되어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나를 괴롭히며 상대를 돕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상대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신업(身業)으로는 돕고 있지만 의업(意業)으로는 참되게 돕지 못한 것이지요. 항상 몸과 마음이 일치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실 모든 짐은 내 스스로 짊어지는 것일 뿐 외부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이런 짐 또한 스스로 짊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짊어지고 무겁다고 말하기보다, 차라리 내려놓고 가볍게 걸어가는 것이 낫습니다. 내가 먼저 행복해질 수 있어야 진정으로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나눔이고 도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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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 스님 : 동국대와 동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전공하였으며, 불심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현재는 군승으로 고성 운학사에서 군장병들과 군가족들을 위해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있으며, 생활수행도량 ‘목 탁소리(www.moktaksori.org)’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나누고 있다. 저서로는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금강경과 마음공부』,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날마다 해피엔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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