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 춤추는 이 시대에도 드물기는 하지만 맑은 거울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서울구치소에서 만난 김기옥(55세) 교도관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이다.
'마음관리'라는 화두를 타파하다
그를 만난 순간 기자는 선입견이 얼마나 큰 어리석음인가를 먼저 반성해야 했다. 사실 유전무죄요, 무전유죄라는 소리가 한때 유행할 정도이고 보면,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치고 마음이 뒤틀리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교도소라는 말만 들어도 음산함이 느껴지는데다가, 그곳에서 재소자들과 함께 부대끼며 사는 교도관들의 이미지 또한 그렇게 살갑게 다가오지는 않았었다.
이러한 기자의 편견을 무색하게 만든 김기옥 교도관. 그의 평화로운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긴 세월 동안 재소자들에게 부어온 햇살 같은 자비행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잘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남의 잘못이나 과실에 대해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간곡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지난 세월 속에서 상채기 나고 또 상채기 났던 안타까운 마음을 넌지시 보여주었다.
”재소자들을 한분 한분 만나보면 다 심성이 착합니다. 다만 인연을 잘못 지어서, 한때 자기의 마음 관리를 잘못해서 영어(囹圄)의 몸이 된 것뿐입니다.
'67년 부천교도소(현 영등포교도소의 전신)에서 처음으로 재소자들과 인연을 맺은 뒤 27년 동안 이 길을 걸어오면서 그는 마음관리라는 화두 속에 파묻혀 살았다.
마음관리, 모든 것이 다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 아닌가. '어떻게 하면 재소자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줄 수 있을까. 어떻게 재소자들에게 자기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공이며 귀하다 귀한 불성존재(佛性存在)임을 깨우쳐 줄 수 있을까.'
재소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의 좌절과 방황이 뼈에 사무치는 아픔으로 다가올 때마다 그의 화두는 꿈틀거렸고 드디어 일련의 작업에 착수했다. ’86년 여름휴가를 이용, 동서양 성현들의 가르침을 두루 망라해서 '마음 다스리는 법'이라는 여덟 구절의 글을 만들었다.
열여섯 살의 나이에 불제자가 되었고, 일상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독실한 불자였지만 그는 요란하게 종교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종교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일을 소리없이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불제자의 모습이라는게 그의 지론이다.
"나의 행복과 불행은 모두 내 스스로가 짓는 것, 결코 남의 탓이 아니다."로 시작해서 "나는 나의 조국, 나의 겨레, 나의 부모와 가정,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라."로 끝나는 '마음 다스리는 법'이 진통 끝에 드디어 완성되었다.
박봉 털어 엽서 수십만장 제작 배포
그는 문안을 완성한 뒤 곧바로 이것을 엽서에 담아 재소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재소자들의 눈빛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기쁨에 넘쳤고 보람찼다. 또한 '이 글이 한때 잘못을 저지른 많은 사람들에게 한순간이라도 자신을 돌아보고 바르게 살아가는 마음다짐을 하는 귀중한 시간이 되게 하였으면'하는 그의 간절한 마음은 법무부를 움직였고 이 글은 전국 재소자 교화 교재로 채택되었다.
전국 교도소에 이 글이 보급되면서 큰 호응을 받자 그는 계속해서 박봉을 털어 서울 명성 여중고 등 4개교와 2군 사령부등 군부대에 수 십 만 장의 엽서를 보내주었다. 다른 어떤 위문품보다 좋아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전국의 모든 군부대에 엽서를 보내리라는 원력을 다시금 곧추세우기도 했다.
그는 작년부터 마음다스리는 지혜의 글 앞면에 태극기와 무궁화의 뜻을 함께 담은 엽서를 배포하기 시작했다. 나라의 얼굴 태극기와 나라꽃 무궁화 사진을 나란히 넣고 그 밑에 태극기와 무궁화의 깊은의미를 담아 놓은 이 엽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찡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물질만능의 이 시대에 희박해져가는 국가의식, 민족의식을 새롭게 깨우치고자 하는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히 배어 있는 이 엽서 한 장. 그 큰 뜻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 한편 마음 다스리는 글 가운데 여섯번째의 “웃어른을 공경하고… 따뜻한 정을 베풀어라.”라는 내용을 "남의 기쁨과 슬픔을 내 일처럼 함께 느끼는 마음가짐이 헤아릴 수 없이 큰 공덕임을 알아라."로 교체해 놓았다. 이것은 민족성을 개조하고자 하는 그의 원력의 소산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아프다." 는 속담이 만연되는 나라가 어떻게 부강할 수 있을 것인가.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때 비로소 개개인이 진정한 화해와 더불어 국가번영이 이루어짐을 그는 간곡하게 역설한다.
그는 올해 정월 외무부의 제안으로 자신이 제작한 엽서를 해외 교민 단체 118군데에 10만 장 정도를 발송하느라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제는 엽서발송하는 데 전문가가 된 아내 오인순씨와 동네분들의 자발적인 협조로 무난하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해외교민들이 태극기와 무궁화가 담긴 엽서를 받아들고 한순간이라도 배달의 겨레임을 자각한다면 더 바랄 게 없단다. 기쁨만큼이나 크게 그의 가정경제는 펑 뚫렸지만 어디 그게 하루 이틀 일이던가. 사실 제작비도 제작비려니와 해외운송비는 만만치가 않았다. 엽서 200장을 보내는 데 운송비가 사만오천원이나 드는 실정 해외교민단체는 1.850게소나 되는지라 혼자힘으로는 좀 버겁다는 생각이 든다.
이세상 모든 일이 불사요, 수행
박봉을 털어 엽서를 제작 배포하는 것뿐만 아니라 ‘89년 자비장학회를 결성, 전국의 재소자 자녀들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해주기도 하고, 군부대와 불우시설위문, 사형수들의 영혼 천도, 국가 안녕을 위한 천도법회 등을 수십 차례 이끌어온 그의 행적에 비하면 법무부 장관 표창(’79, ’89)과 교정국장 표창(’91), 총무처장관 표창(’93) 등이 오히려 무색하다.
그는 여러 가지 봉사활동 외에도 ’87년 서울구치소 내에 교도관들을 중심으로 불심회를 창립했다. "우리 회장님 생불(生佛)이지요."라고 거침없이 얘기하는 임장수(불심회부회장) 교도관의 말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그의 참된 신행생활과 보살행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는 창립부터 지금까지 불심회를 이끌어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울구치소 내의 경비교도대의 구도회 지도법사로서 군인들에게 부처님의 법을 열성적으로 전하고 있다.
"함께 배우고 공부하고 있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겁니다. 구도회 회원들 덕택에 갖가지 경전을 두루 보게 되었습니다."
가르치는 기회를 주어서 오히려 더 큰 공부가 됐다면 겸손해하는 김기옥 교도관 그는 매사가 그런 식이고 이 세상 모든 일이 불사 아니고 수행 아닌 게 없음을 확언한다.
"종교가 그 본래생명력을 지키느냐에 역사의 성쇠를 좌우할 만큼 종교는 인류사회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고 영국의사학자 크리스크퍼가 말했습니다. 종교가 본래 기능을 상실하면 그 사회는 균형을 잃고 난맥상에 빠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조석으로 예불을 드리고 직장인 서울구치소에 와서도 경비교도대 정원에 있는 지장보살님전에 참배를 드리고 하루를 여는 김기옥 교도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종교적 체험을 깊이 간직하고 있기에 진리의 실상을 모르는 재소자나 일반인들이 안타깝기만 하고 그 마음만큼이나 원력 또한 옹골차다.
의식개혁운동에 여생 바칠 터
“재소자들치고 반성 안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잘못인 줄 알면서도 또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작심삼일 ’이라는 말이 있지요. 작심삼일이 되는 것은 정신이 가다듬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반적인 의식개혁, 확고한 믿음과 실천을 요구하는 종교의 가르침으로 사람 사람마다 거듭 태어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듯 싶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인과법을 명확히 깨우친다면 어느 누가 죄를 지을 것인가. 나 하나의 잘하고 잘못한 것이 온국민과 국가 전체에까지 그 결과가 정확히 돌아온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어찌 물의를 빛을 것인가. 이 하늘 아래 함께 사는 너와 내가 한몸임을 인식한다면 어떻게 나 하나만의 안녕과 복란을 꾀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단법인 법시사를 작년에 인수받게 되었습니다. 좀더 게획적이고 구체적으로 일을 해 나갈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밝은 마음 밝은 사회 운동으로 의식개혁에 여생 바쳐 임하겠다는 그에게 법시사 일까지 보태졌다. 문서포교, 장학사업, 불우청소년 생활지원 사업 등의 법시사 목적사업은 그가 오래 전부터 해온 일이지만 이제는 뜻을 같이 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서 보다 폭넓게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지장보살의 지옥중생까지 다 제도하기 전에는 끝내 성불하지 않으리라.”는 서원력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릿저릿하다는 세관(世觀) 김기옥 거사. 그의 맑은 거울에 우리들의 모습을 한번 비추어볼 일이다. 부처님이 일러주신 행복의 법칙을 그대로 실천하는 그의 삶을 통해 우리들 모두 새롭게 태어날 일이다. 이 새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