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불교는 호국불교로 자리를 굳힘과 동시에 무속신앙과 풍수지리설과도 관계를 맺었다.
시대적 배경
고려의 국가적 종교가 불교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불교는 삼국시대 이래로 통일 신라에 걸쳐 널리 행하였으나 고려의 건국과 더불어 더욱 성하였다.
고려의 불교는 개인적인 신앙과 유한자로서의 무한ㄴ자의 추구나 영혼의 구제보다는 국가의 안태(安泰)와 번영과 수호를 위한 국가적인 호국 신앙에서 그의 융성을 보게 된 것이다. 태조는 그의 십훈요에서 <우리의 국가대업은 반드시 제불(諸佛)의 호위하는 힘을 입는 것이다>하고 <모든 사원은 도선의 산수의 순역(順逆)을 추점(追占)하여 세운 것이니 함부로 아원을 창건하면 지덕(地德)을 손박(損薄)시켜 왕업이 길지 못하리라> 하여 국가의 대업이 불력에 힘입는 것과 풍수지리인 도참사상에 의하여 사원을 창건하면 지덕을 비보함으로써 국운이 성한다는 것을 남겨놓았다.
이때부터 고려 불교는 호국불교로서 자리를 굳힘과 동시에 쉽게 재재의 무속신앙과 풍수지리설인 도참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현실생활의 접촉면에서 사회적인 중요성을 나타내게 된다. 고려의 귀족들이나 일반 서민들까지도 불교를 국가나 개인의 현세에 있어서의 행복을 좌우하는 현세이익의 종교로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태조 이래로 국가나 왕실의 융성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사찰의 창건이라든가 각종 불사가 끊길 새 없었으며 국가적 불교행사만 하더라도 연등회, 팔관회 등으로 이 두 행사는 모두 고유한 전통적인 습속과 결합된 불사로서 군신이 음악, 가무, 백회 등으로 제불과 천지신명을 즐겁게 하여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빌기도 했다. 그밖에 정기적인 행사로서 축수도량(祝壽道場), 기진도량(忌辰道場),보살계도량(菩薩戒道場),장경도량(藏經道場), 무차도량(無遮道場),경행(經行), 인왕백고좌도량(仁王百高座道場)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불사는 자연히 승려의 위치를 높이게 되었으면 그들에게 계급을 주어 왕사, 국사의 칭호까지 제도화함으로 승려는 사회의 중요한 위치에 임하게 되었고 한편 그들은 국가로부터 토지의 급여를 받고 또 역(役)의 의무도 면함과 동시에 사원전(寺院田)은 면세의 특전을 누리어 사원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로부터 특권을 받은 불교는 쉽게 민가의 토속신앙인 물속과 영합하고 또한 도참설에까지 미혹하여 진정한 종교로서 중생을 계도(啓導)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보조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이 두 미신의 결합으로 묘청의 난(1135)까지 유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보조는 의종12년(1158)에 태어나 희종6년(1210)에 53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보조가 산 시대는 이미 불교의 승려들이 명리를 탐하고 속화(俗化)된 타락의 길로 들어가 있었을 때이다. 따라서 그는 무엇보다는 불교가 어떠한 종교인가와 수행인은 어떠한 방법을 취하여야 하는가를 뚜렷이 밝히려 노력했고 그것을 체계화하여 신라의 원효와 더불어 두 개의 우뚝 선 봉우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불교에 있어서 교종이 주로 이 속세의 현실을 그 불경에 의해서 연역적으로 설명하는데 반하여 선종인 불입문자(不立文字), 견성오도(見性悟道),의 입장이 나말(羅末)이래 고려 일대에 극성하였다. 그러나 이 선종은 민간신앙으로 전달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수행인들의 위치에 더욱 활발했다고 보여지고 오히려 민가들은 기복 불교가 호국신앙과 연관을 갖게 됨으로 토속신앙과 형성 결합된 무속으로까지 발전되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선종이 불교의 타락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시대적 여건에 의하여 사회구조상에서 진정한 수행인이 없음으로 고려 불교의 퇴보를 가져온 것이라 생각된다. 보조가 산 시대는 이와 같은 불교의 영향 밑에서 의종 명종 신종 희종 등 4대에 걸쳐 살았으며 이 시대 중 의종24년(1170) 보조가 13세 때에 무신의 난이 일어났으며 이 난에서 의종은 폐하고 그 아우 명종을 옹립하였다. 이 동안 국정은 혼란하고 무신들의 상쟁이 끊이지 않았고 계속해서 명종2년(1172)서계, 명종 6년(1176)공주, 명종12년(1182)전주 등에서 민란이 일어나 사회는 어지러워 있었다. 그러나 보조는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도 오로지 참된 수행이 무엇인가를 찾았고 그는 어떤 의미에서 이와 같은 국란은 참된 불교를 믿지 않는 데서 온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보조는 25세 때에 승선(僧選)에 합격하고 난 후 그의 동료들에게 ⌈이 회(會)를 능한 후에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정혜로 균수(均修)하여 예불과 전경(轉經)함을 집노(執勞)하고 달사(達士)와 진인(眞人)의 높은 행을 따르자⌋ 라고 그의 이상을 피력한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승려들이 진실한 수행과 이타행원(利他行願)을 떠나서 명문과 제양(制養), 개인의 입신영화만 추구하는 타락을 얼마나 가슴 아파했는지 그는 그것을 그의 많은 저술 속에 피력했다고 보여진다.
普照의 思想
보조는 승려된 자가 참된 수행인으로서 수행에 뜻을 두지 않고 그 시대적 조류에 휩싸여 비승비속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통탄하였고 이러한 풍조가 왜 일어났는가를 추구하였다. 그 당시의 승려들은 수행에 몰두하여 경이나 선을 절차탁마하지 않고 일상적인 국가적 봉불사에만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다운 깨달음의 공부를 하지도 않았고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 방법도 모르고 있었다. 여기에서 보조는 그 시대의 일반적 유행인 수행하면 신통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척결하여 참다운 믿음은 신통변화와 같은 요행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돈오점수임을 강조한다. 깨닫지도 닦지도 않고 신통변화만 먼저 원하는 그러한 수행은 사견이요, 아무리 깨달았다 하더라도 점점 닦아 나가지 않으면 인간이 가지는 습기나 관념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돈오점수의 사상은 국가의 비호를 받는 그 당시의 승려들이 실제로 수행은 하지 않고 깨달았다고 주장하여 혹세무민하는 경향이 있어 올바른 불교가 개현되지 못함을 보고 수행방법으로 지시한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은 언제나 수시설법, 대아설법(對我說法)이었다. 따라서 그 근거에 따라 설법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근기로서 참된 수도를 하지 않고 상근기의 경지를 함부로 자기가 깨달은 것인 양 거짓으로 아만에 빠져 다른 사람과 자기를 속이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깨달았다는 위선을 타파하기 위해서 점수를 들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불조의 근본사상인 돈오돈수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깨달은 사람이라야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아직 깨닫지 못한 범부의 입장에서는 돈오돈수가 문제되지 않는 것이었다.
보조는 정법불교는 또한 깨달음의 공부는 다른 명리와 세속사의 능란한 처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하루 종일 전경과 예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전과 예불이 근본적인 수심의 핵심을 잡아야 하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즉심시불(卽心是佛)을 믿고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이 마음이 부처라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마음은 우리의 심리적 모든 상태를 나타내는 원천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더 형이상학적으로 나아가 일체의 근원으로서, 말로서 형언할 수 없는 깨달음의 어떤 절대적인 상태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을 하는데 그 기본을 개인의 기복이나 사업의 성취가 아니라 근원적인 이 마음의 깨달음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나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의 세계에 들기 위해서는 경절문(經截門)과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으로서 들어가 그 세계의 증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으로 세문으로 열어 보였다. 그리하여 보조는 타력신앙으로 치닫고 있는 고려불교를 자력신앙으로 바로 잡았던 것이다.
고려불교에 끼친 영향
보조의 이러한 주체적인 신앙은 고려불교를 한때나마 정법에 들게하여 바른 신앙으로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의 송광사는 16대 국사를 일으키면서 교(敎),선(禪)의 융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나 보조가 진정으로 수심수도에 애쓴 교와 선의 병행을 후세에서는 선의 면에서만 치중하여 교의 발전에 제동을 걸었고 이것은 결국 선이 견성오도하는 방법으로서 불경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정려, 화두에 의하여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불성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주관적이었고 객관적인 기준이 선종이 논했기 때문에 일부 사이비승들의 타락된 현세와의 영합과 삿됨을 나타내는 소지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보조가 주장했던 수행의 방법으로 교를 무시하지 않고 선 쪽에 있으면서 그 깨달음의 세계를 교로 인증하는 방법을 그대로 유지했더라면 고려의 불교는 보다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으리라 믿는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 선의 주관적인 일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에서 보조와 같은 돈오점수의 목우행이 간절히 원해지고 선과 더불어 경을 통한 증득의 세계가 증명되도록 우리 자신의 발명에 힘써야 되리라 믿는다. 참으로 지금 보조는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야 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