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대승의 원리와 실천
(1) 대승계와 소승계
대승계의 근본정신이라 할 때 문제는 많다. 무엇보다 대승의 깊은 의미가 파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대승계를 말한다면 소승계와는 어떻게 차별이 있느냐 하는 문제도 당연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소승계는 비구계 250게 비구니 348계를 들어 말하는 것이고, 대승계는 범망경을 위주로 한 보살사상과 보살계 58조를 들어 말하게 된다.
대승계와 소승계를 구분하여 말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대승계의 근본정신으로 말을 한다면 거기에는 대승계 소승계의 구분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계목(戒目)의 서술형식을 볼 때 그것이 이른바 대승계이든 소승계이든 간에 모두가 어떤 것을 [하라] 또는 어떤 것은 [하지마라]하고 규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계의 규정을 대할 때 [하지마라] 하기 이전에 존재하는 근본사상에 착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작위이던 불작위이던 그러한 지시가 나오려면 그에 앞서 있는 고차적 상위규범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겉으로 나타난 형식상으로 볼 때 소승은 융통성이 없으리만치 아주 엄격하다. 반면에 대승계는 융통성의 범위가 아주 넓어 형편에 따라 자유스러이 개차방편울 베풀도록 되어 있다. 특히 대승계의 경우에는 근본정신이 무엇보다 중요시되기 때문에 대승계가 추구하는 상위가치를 구체적인 현실위에서 실현하는 것이므로 격식상의 규정인 계목에 정해진바 [하라] [하지말라]는 작은 것에 집착하는 것을 오히려 경계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2) 인간존재의 사회성과 죄
범부들은 허다한 허물 속에 묻혀산다. 죄에 싸여 산다고도 할 수 있으니 불조와 같은 대왕성자를 제하고는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겉모양으로 지켜가는 소승계의 경우라면 직접 남을 미워하는 말을 하거나 남을 해치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그런대로 자기도호(塗糊)가 될지 모르지만 대승계에 의하면 해위에 나오는 이전에 마음으로 범하였으면 이미 죄를 지은 것이 되므로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사람을 미워하는 생각을 품기만 해도 허물이며 죽일 생각이 움직이면 이미 살인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승계의 정신을 지켜가는 것이므로 이계(理戒)라 하고 소승계는 행동적 사상(事象)으로 지켜가는 것이므로 사계(事戒)라 한다.
계가 이런 것이므로 완전한 계를 가지기란 실로 쉬운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보살계를 설하는 것을 사방에서 보지만 보살계에서는 그 장엄한 의식보다도 보살정신이 중요한 것이다. 계는 받고 안받는 데서 범하고 안 범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정신에서 볼 때 자신의 깊은 참된 정신을 구체적 현실에서 살리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또 우리들은 개체로서 개인이 따로따로 살고 있는 듯 하지만 대승정신에서 보면 모두가 공동으로 서로 어울려서 살고 있는 것이다. 죄는 단독으로 지을 수도 있지만 공동으로 사회를 형성해서 사회로서도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전체가 진실을 행하고 청정을 행하고 정의를 행하지 않는 한 사회의 공동 요소인 우리 개개인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보게 된다.
어느 모로나 계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현재도 혹은 알면서 혹은 모르고서 혹은 ??으로 혹은 여럿이 협동하여 함께 허물을 범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3) 참회와 발원
이와 같이 끊임없이 하물 속에 살고 죄속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는 참회와 끊임없는 정진이 요청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계를 가지는 것은 그 정신이 바로 서야한다. 바른 믿음, 바른 이해 위에서 과감히 바른 행의 전개가 요청된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현실생활이 피할 수 없는 사정하에서 죄를 짓게 하고 또한 그것에 끌려가게 되어 있다. 아무리 진실과 청정을 행하려 하여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에 휩싸여 허물을 짓고 있는 것이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치고 남의 허물 말하거나 자기는 청정하다고 큰 소리 치고 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큰 소리 키는 그 자체가 이미 어두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겸허(謙虛)하고 하심하며 참회를 끊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참회는 적극적으로 큰 발원으로 발전하고 나아가 보살의 서원으로 지향하는 것이다. 스스로 미혹해서 알게 모르게 지은 허물을 참회하고 나아가 모든 중생이 지은 죄의 극심한 과보를 대신 다 받으며 마침내는 원수나 친한이나 차별없이 모두가 성불할 것을 발원하며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승계의 실천은 그 정신에 있고 스스로를 살펴 항상 겸허하고 참회하는 데 있으며 그것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큰 발원으로 온 행위를 집결시키는 것이다.
(4) 대승계의 적극정신
대승계의 이러한 성격은 결국 인간의 행위를 날날 행위에 붙잡아 좋지 않고 적극적인 보살생의 전개를 그 내용으로 하게 된다. 선종의 한 종파인 조동종(曹洞宗)에서는 비구계나 보살계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 대신 삼취정계(三聚淨戒)와 사섭법(四攝法)과 육바라밀계를 받는다고 한다.
삼취정계라 함은 중생을 모두 섭수하겠다는 섭중생계(攝衆生戒)와 자기의 행을 법다이 청정하게 지켜나가겠다는 섭율의 계와 모든 선법을 받들어 행하겠다는 섭선법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섭법은 보살이 중생을 섭수하고 더불어 수행하며 불도를 닦어가는데 네 가지 방법이니 보시 · 애어 ·이행 · 동사의 네 가지다. 그리고 육바라밀에는 다들 아는 바와 같이 보살이 스스로를 닦고 불국토를 건설해 가는 기본궤도인 여섯 가지 길이니 바로 보시 지게 인욕 정진 선정 지혜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적극적으로 중생을 섭수하고 교화하며 스스로 청정규범을 지켜가고 또한 일체선법을 받들어 행하여 필경 중생의 성숙과 불국토의 건설을 추구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대승계 정신의 구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보살의 대비 원력이나 구세정신은 이것이 그 본질을 추구할 때 [자비] 한마디에 그친다. 이 자비가 없으면 보살일 수 없고, 대승계는 이미 이룰 수 없다. 자비심을 크게 발하여 큰 자비행을 할 때 그 안에 대승의 온갖 오묘한 계를 다 갖추게 되는 것이다. 만약 자비심이 없다면 그는 이미 계를 파(破)한 자이다.
(5) 자비와 개차
대승의 정신이 행으로 뛰어나올 대 그 행을 보살로 결정짓는 원리가 바로 자비인 것을 우리는 알았다. 이 자비는 결코 소극적인 자비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보살계를 말씀하신 범망경에는 [무엇무엇을 고의로 하지마라] 한 대문이 26군데 있다. [하지말라]는 이 말씀은 스스로 청정심과 보살심과 지혜심을 담아가는 데 참으로 중요한 것으로써 결코 터럭끝만치라도 소홀히 하여서는 아니된다. 그렇지만 참으로 보살정신이 충실한 때는 능히 그 계가 지닌 올바른 정신을 파악하여 형식상의 게 조문에 얽매임이 없이 적극적 자비행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옛날 선세대왕은 부처님 인행시의 한 보살이다. 당시 그 나라에는 많은 바라문들이 있어서 불법을 배척하고 극한적 방법으로 전법을 방해하였다. 저들이 짓고 있는 죄는 무량집을 무간지옥에 들어가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 때 선세대왕은 저들의 지옥고를 구제할 것을 생각한 나머지 저들의 지옥행을 막기 위해서는 불가불 현생의 생존을 끊을 수밖에 없다는 데 도달하였다. 이렇게 하여 선세대왕은 저들 바라문 외도들을 죽여 버렸다. 미워서 죽인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였으며 그의 지옥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죽였던 것이다. 만약 저때에 선세대왕에게 터럭끝만큼이라도 사적인 분십이나 복수심이나 포악한 마음이 있었다면 그는 중죄를 범한 것이지만 오직 순수한 자비심인 까닭에 그는 살생으로 보살행을 한 것이다. 또 부처님 당시에 파사익 왕의 왕후인 말리부인은 술을 권하는 것으로 계를 지켰던 것이다. 평소 강폭한 파사익왕이 그 성질로 해서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에게 술을 권하여 그의 마음을 풀게 한 것은 만고에 남는, 술로 계 지킨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승계의 이와 같은 적극성을 바로 이해하여 남을 구제하고 사회를 밝게 해야 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만약 터럭끝 만큼이라도 자비심이 없거나 지혜의 살핌이 없으면서 술마시고 혹은 살생을 한다면 그이 입으로는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틀림없이 지옥 갈 것이다.
(6) 불국 건설자가 가는 길
계도 많다. 비구계 · 비구니계 · 보살계 · 사미계 · 사미니계 · 식차마나계 · 팔관재계…… 그런데 이들계를 참으로 지키려면 그 참된 정신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살고 스스로 자기들의 마음을 청정히 하기 위하여 계를 닦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청정한 마음땅이 들어나서 걸림 없이 청정심을 쓸 수 있는 사람에게는 계라는 것이 필요 없게 된다. 그 사람의 모든 행이 제절로 계에 척척 들어맞게 된다. 그렇지 못할 바엔 우리는 끊임없이 자성의 청정을 지키며 진실과 자비를 행하는 보살정신을 행하도록 계를 배워야하는 것이다.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보살정신이 뚜렷이 살고 대승계의 근본정신이 행위마다 펼쳐나가려면 무엇보다 참된 자기마음을 바로 알고 이를 중심삼아 생활해 가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 일체 계가 살아나는 것이며 불법의 길이 열려가는 것이며 나아가 광명의 길이 실현되는 것을 우리는 굳게 믿어야 할 것이다.
대승계는 그 형상이 너그러운 만치 깊고 세밀하며 그 정신이 엄격하다. 탕탕무애가 대승계가 아니라 적극적 자비원력의 대정진이 대승계인 것이다. 이렇게 순수한 대승정신을 실천하는 데서 진흙에 처하여도 물들지 않고 티끌에 뭍혀도 때묻지 않는 처렴상정의 광명스러운 보살대도가 열리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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